한층 더 서늘해진 바람에 옷깃을 여미게 되고 따뜻한 차 한 잔이 그리워지는 깊은 가을이다. 그 어느 계절보다도 풍성한 계절인 가을은 마음까지 여유롭게 만든다. 특별히 재래시장에 널려 있는 가을 먹거리들은 그윽한 자태와 향기로 우리의 오감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통통하게 살이 오른 햇대추다. 완전히 붉게 물들어 쪼글쪼글해진 대추도 맛있지만 얼룩덜룩 붉은 옷을 입다가 만 것 같은 통통한 햇대추는 1년 중 이때만 맛볼 수 있는 기분 좋은 풋풋함이다. 대추를 볼 때마다 생각나는 좋아하는 시가 있다.시인 장
난 타고난 기계치다.나에게 컴맹은 이빨과 공존하는 껌이라고나 할까.그러다보니 페이스북(Facebook)이나 트위터(Twitter) 같은 SNS(Social Network Service)와 친하다는 것은 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행위였고 SNS는 너무나 차가운 세계로 나랑은 태생부터 친할 수 없는 운명적 관계였다.어쩌다 내가 페이스북(이하 페북)에 가입을 하게 됐는지는 정말 모르겠다. 언젠가부터 난 페북 회원이었고, 가까운 지인들의 친구 신청을 수락하며 그렇게 간신히 페북 회원으로 살아가고 있던 어느 날이다. 페북이 나에게 말을 건
상식의 이야기를 아무도 믿지 않는 세상이다. 비상식의 법칙이 판을 치는 세상은 어둠이 짙고 그 속에서 나는 신음소리가 높다. 믿지 않고 믿은 신앙의 신음소리, 믿고 믿은 사랑의 신음소리에 세상도 사람도 진실의 가치가 무엇인지 몽롱할 뿐이다. 이런 중에 믿거나 말거나식 유언비어는 사람과 세상을 만취시킨다. 나와 너는 유언비어라는 말에 취해 산다. 취한 의식이 정상일 수는 없다. 취중 진담이라고는 하지만, 취한 세상 건너기 위한 억지의 신앙은 신앙이 아니고, 억지의 사랑 또한 사랑이 아니다. 어떻게 우리는 이 지경으로 취해 살까. 문명
오늘날 대한민국은 그 어느 때보다 풍요로워 보이지만 갈등과 어두움의 그림자가 깊다. 지도자들은 국민에게 믿음을 주지 못하고, 가진 사람들과 갖지 못한 사람들 사이의 차별로 불신과 갈등, 불통의 병에 걸려있다. 물질이 인간보다 우선시되는 세상에서는 정의를 바로 세우기 어렵다. 이는 우리 사회의 환경적 요인들로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이 많고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사회일수록 더욱 그렇다.한국 영화의 기록을 모두 갈아치운 영화‘명량’에 관객이 몰리는 것은, 이 시대 진정한 지도자의 출현을 바라는 국민들의 리더십에 대한 갈망 때문이라 본다.
차 수수밥에 들깨미역국, 고등어 카레구이에다가 올방개 묵무침과 배추 김치에 골드파인애플까지…. 오늘 우리 집 메뉴라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그 건 아니고 우리 딸아이의 학교 급식메뉴다. 이름만 들어도 어찌나 화려한지 군침이 돌고 누가 나 좀 이렇게 매일 차려주면 좋겠다 싶은 뜬금없는 생각도 든다. 사뭇 진지한 척, 아이에게‘엄마도 너네 학교 점심시간에 가서 좀 얻어 먹으면 안 될까?’했더니 창피하다고 펄쩍 뛰며 장난스럽게 눈을 흘긴다. 아닌 게 아니라 가족들에게 날마다 반찬을 무얼 해먹일지 몰라 심히 곤혹스러울 때마다 아이의 학교급식
며칠 전 어떤 금혼식에 다녀왔다. 말 그대로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서 결혼하고, 아들 둘 낳아 장가보내고 50년의 생을 같이한 노부부를 축하하는 자리였다.그분들과 인연은 내가 2011년 다큐프라임 ‘치매를 부탁해’ 를 제작할 때이다. 신경외과 의사선생님 소개로 치매를 앓고 있는 할머니와 보호자인 할아버지를 만나기로 했는데 할아버지는 나를 피해 도망가셨다. 한참을 기다려 만난 할아버지는 나와 얘기도 안 하신다. 무슨 자랑거리라고 방송에 나가서 떠들겠냐고. 그렇게 하루 이틀…삼고초려를 했나 보다. 겨우겨우 간신히 말을 섞게 되었는데
그 사람은 죽었다가 살아났다. 이 말에 대한 해석은 가능할 수도 있고, 전혀 불가능할 수도 있다. 성경에서 예수님은 신의 아들로서 자신의 죽음을 일으켜 세웠다. 그분 뿐 유사 이래 사람의 아들로는 죽음의 무저갱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이 없다. 그렇다면 신의 아들과 사람의 아들, 그 경계는 분명하다. 세상사 쉬운 사람 이야기나 하지 왜 어려운 신의 이야기를 들추는가. 쉬운 이야기는 쉬워서 모르고, 어려운 이야기는 그야말로 어려워서 모르는 세상이 돼버렸다. 지금까지 사람이 만들어 써 먹은 어떤 가설도 통하지 않는 소위 말세라는 것이다.
금년 2014년은 광복 69주년이며 대한민국 건국 66주년을 맞는 해이다.뿌리 없는 나무가 있을 수 없고, 근원 없는 강물이 있을 수 없듯이, 뿌리는 우리의 역사이며 우리의 조상이다. 우리 역사는 우리 스스로 지켜 나가야 한다. 먼저 우리 조상의 역사를 알고 문화를 알아야 올바른 교육을 갖춘 나라가 될 수 있다. 우리 조상을 알고 충(忠), 효(孝), 예(
누가 뭐래도 도전하는 삶은 아름답다. 도전하는 스스로에게나, 보는 이들에게나 심장을 뛰게 만드는 일임은 분명하다. 물론 새로운 도전에 따르는 고단한 댓가를 치러야 하는 과정도 필요하지만, 내가 알지 못했던 나의 또 다른 모습이나 능력을 알 수 있게 된다는 것은 결과의 어떠함에 관계없이 그 자체로 인생의 보석과 같은 모습일 것이다. 우리 선수들의 값진 메달 소식으로 밤잠을 설치고, 피겨 심판의 편파 판정 의심으로 우리나라 국민들이라면 너 나 할 것 없이 한동안 분해서 씩씩거렸던 동계 올림픽이 열렸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아시안게임
운동삼아 동네를 산책하다보면 자주 만나는 인물들이 있습니다.봉구도 그 중 하나입니다. 아, 봉구는 개입니다.봉구를 처음 본 게 여기 이사와서부터였으니 그녀석 나이가 못 먹어도 9살은 됐을 겁니다.개 나이로 쳐서 지금은 환갑진갑 다 지난 노인네가 됐을 겁니다.십년 가까운 세월 여일하게 봉구는 산책을 다닙니다.11단지에서 12단지로, 15단지에서 16단지로 기름기 잘잘 흐르는 단정한 모습으로,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앞만 보면서 산책을 다닙니다.아, 물론 혼자 다니는건 아닙니다.봉구의 뒤에는 항상 두발짝 쯤 뒤쳐져서 목끈을 쥐고가는 할머
바다는 말이 없다. 아니다. 바다의 말은 너무도 차고 넘쳐서 사람의 작은 귀로는 들을 수가 없는 것이다. 육대주를 안고 있는 오대양의 바다는 그 자체로 우주하고도 통하는 말씀을 하고 있다. 그런데 팽목항 난바다, 세월호를 삼킨 그 침묵의 바다는 왜 통곡을 부를 뿐 달리 말씀이 없는가. 무슨 할 말이 더 있겠는가. 수장된 희생자들의 원혼의 울음이 하늘을 찌르고 내려와 바다를 잠재웠는데. 바다도 기가 차면 사람보다 더 감정적이다. 기가 찬 바다의 침묵은 그만큼 의미심장하다는 것이다. 그렇다. 침묵의 바다에서 일어서는 파도의 말씀을 새겨
우리 한글의 위대함을 새삼 느낀다. 먼저 ‘인생’(人生)이란 글자를 우리글로 순서대로 써보면 ‘0’에서 시작해서 ‘0’으로 끝난다. 인간은 자연(自然)에서 빈손(0)으로 왔다가 하늘에 순종하면서 자연과 함께 살다, 결국 빈손(0)으로 자연에 되돌아가는 것이 세상의 순조로운 이치다. 이렇게 ‘인생’이란 한단어로 인간의 삶을 함축한 언어가 한글 말고 어느 나라 글자가 있는가? 스무살 나이에 왕이 되어 세계를 정복한 알렉산더 대왕이 죽으며 남긴 마지막 말이다. ‘나를 묻을 땐 내 손을 무덤 밖으로 빼놓고 묻어주게, 천하를 손에 쥔 나도
농염한 푸르름이 우리를 유혹하는 계절이 한창이다. 산이나 바다나 계곡은 어디에나 뚝뚝 떨어지는 초록을 어쩌지를 못해 우리에게 연신 손짓하느라 여념이 없다. 그 기대를 져버릴 수 없다는 듯, 사람들은 자연과 기꺼이 하나되어 뒹굴기를 소원하는 계절이다. 그런데 그게 마음처럼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은가보다.얼마 전 아는 사람 김씨(43세)로부터 희안한 소리를 들었다. 캠핑이 한창인 요즘, 자기의 친구 가족도 요즘의 피서 분위기에 발맞춰 근교로 캠핑을 나갔다. 그런데 막상 텐트를 치고 나니 아이들이나 아내는 텐트 안에서만 틀어박혀서 나올
차를 타고 가다 차창 밖으로 어떤 오래된 풍경을 봤다. 허름한 옷을 입은 아주머니 몇 분이 도로 옆에 모여 앉아 수다를 떨며 나물거리를 다듬고 계셨다. 그 옆으론 아이들 10여명이 두 팀으로 나뉘어져 보잘 것 없는 낡은 놀이기구 위에서 폴짝폴짝 덤블링을 하며 까르르르 웃고 있었다. 그리고 할아버지 두 분은 그들을 내려다보며 계단위에 앉아계셨다. 별 것 없었다. 그냥 잘사는 동네가 아닌 회색빛깔의 지저분하고 칙칙한 동네일 뿐이였다. 그런데 사람 사는 냄새가 났다. 아이들은 학원이 아닌 작은 동네 공터에서 또래들과 모여 별거 아닌 놀이
사람 몸속에 전기가 흐르고 있어 오장육부가 제 기능을 한다. 그러니까 사람은 전기의 힘으로 눈동자가 돌아가고, 머리가 좌우상하로 움직이고, 손발이 작동한다. 그리고 나아가 모든 사람은 자기만의 고유한 몸의 힘으로 남을 사랑하고, 또 남을 미워도 한다. 남녀가 만나 첫눈에 전기를 뿜어 서로 통하면 사랑이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것은 아주 간단히 정의한 생의 단면이다. 그렇다면 사람은 몸속의 전기로 살아간다는 말이 그르지 않다. 생체학에 의식을 버무린 이 말을 나는 친구에게서 듣고 새삼 마음에 새겼다. 친구가 병원에 가서 정밀검
우리는 지금 엄청난 변화의 한복판에 서 있다. ‘빽’과 ‘줄‘을 잘 잡아야 성공하던 ‘연줄사회’에서 ‘네드워크(Network)사회‘로 급격하게 바뀌어 가고 있다. 네트워크 사회는 종래의 혈연이나 계층적 조직보다 개방적이다. 정보와 자원을 더 자유롭게 교환한다는 특성과 구성원들 관계도 대등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혈연처럼 강하지는 않다. 유대가 약하기 때문에 자기가 스스로 움직이며 정성껏 돌보아 주지 않으면 어떤 인적 네트워크도 확보할 수 없는 세상이다. 연줄만 잘 잡으면 편안했던 시대보다 더 힘들고 피곤한 삶이 될 수도 있다.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