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리스크랩 소장
                  김훈 리스크랩 소장

실레노스는 술의 신 디오니소스에게 포도주를 만드는 법을 가르쳐준 인물로 지혜의 상징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그의 모습은 포도와 술잔을 들고 술취한 배불뚝이로 묘사되지만 예언의 능력을 가진 현자로 그를 붙잡기만 해도 그가 가진 지혜를 빼낼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하루는 디오니소스가 트몰로스 산에서 사티로스 무리들과 함께 어울리고 있을 때 실레노스가 술에 취해 농부들에게 붙잡힌다. 농부들은 실레노스를 프리기아의 왕 미다스에게 바쳐졌다. 미다스는 잡혀온 실레노스에게 인간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졌다. 실레노스는 미다스에게 "우연의 자식이여, 고통의 자식이여, 가련한 하루살이여 들으라. 네가 가장 좋은 것은 네가 도저히 얻을 수 없는 것으로, 가장 좋은 것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며 그 다음 좋은 것은 빨리 죽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소포클레스의 희곡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도 실레노스가 말한 비슷한 구절이 나온다. 세상에 태어나지 않는 것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지만, 일단 태어났으면 빨리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는 게 최선이다. 청춘의 경박한 어리석음이 지나간들 어느 누가 근심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인생의 무거운 짐에서 벗어날 수 있단 말인가. 질투, 갈등, 불화, 전쟁 등 그 어느 누가 이와 같은 비통함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 인생의 마지막에는 모든 이가 싫어하는 노령이 찾아온다. 힘도 없고 친구도 없는 나이가 엄습한다. 그러한 황혼의 시절에 의지할 곳도 없이 온갖 쓰라린 일을 견디며 살아야 한다. 이것이 인생이다. 

​염세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인생은 고통이며, 그 귀결은 허무라고 말했다. 인간은 생존의지의 노예일 뿐이며, 삶이란 욕망과 권태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시계추와 같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고통은 의지와 욕망때문이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의지를 버리는 체념의 염세주의가 답이라고 했다.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크게 받았지만 쇼펜하우어와는 달리 그는 인생을 사랑했다. 니체는 기독교가 인간의 건강한 삶을 죄로 가득찬 것으로 규정하며 인간을 병들게 한다고 비난했다. 

​죽음과 파괴를 면할 수 없는 인간의 삶은 고뇌와 비극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그 비극이 있기 때문에 생은 아름답다. 그에게 있어 그리스 비극은 삶의 고통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해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예술이었다. 비극을 피할 수 없는 인간이 삶을 긍정하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오이디푸스처럼 자신에게 던져진 가혹한 운명을 피하기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은 초인이 돼야 한다. 초인은 완성된 인간이 아니라 어제 보다 나은 인간이다. 진보는 어제의 나보다 나아지는 것이고 초인은 계속해 진보해 가는 존재이다​.

​인간은 낙타로부터 초인으로 성장해 가야 한다. 낙타는 사막을 건널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다. 인간의 삶은 고통이라는 짐을 짊어지고 사막을 건너가는 낙타와 같다. 뜨거운 태양과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다람쥐 쳇바퀴 돌듯 끊임없이 인내하며 걸어가야 한다. 삶의 짐을 짊어지지 않으려면 강한 자에게 몸을 의탁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자유가 없는 갇힌 자의 삶을 살 수밖에 없다. 강자에게 몸을 의탁한 노예와 같은 비굴한 자의 마음속에는 강자에 대한 복수와 원한만이 가득하다. 그러한 원한만을 갖고 사는 인생은 결코 행복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강한 자에게 의지하지 말고, 고통스럽더라도 스스로 짐을 지고 가야 한다. 사막을 건너는 낙타처럼 자신의 멍에를 짊어지고 낙타처럼 사막으로 떠나야 한다. 

​사막에 도착하면 당신은 용을 만나게 된다. 용은 사회가 요구하는 규율과 법이다. 용은 당신의 삶의 주인으로 행세하려고 한다. 타인적인 규제와 명령을 내리는 용과 싸워 이기기 위해서는 이제 낙타를 버리고 사자가 돼야 한다. 사막이라는 고통의 땅에서 당신이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용과 일전을 벌이는 것이다. 당신의 삶의 자유를 위해 모든 규제와 규범에 저항하라. 진정한 자유는 그냥 무엇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유가 아니다. 무엇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진정한 자유이다. 용은 당신에게 자유를 줬으니 내게 복종하라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사회의 틀에서 당신을 규정한 반쪽짜리 자유일 뿐이다. 당신이 누려야 할 자유는 당신이 뭔가를 새롭게 창조하는 적극적 자유이다. 

​당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 적극적 자유를 얻으려면 이제 사자를 버리고 어린아이가 돼야 한다. 어린아이는 사회가 원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가 원하기 때문에 움직인다. 자기 스스로가 자기를 움직이는 자기 원인이 된다. 어린아이는 기존질서를 무시하고 새로운 규범을 만들어낸다. 어린아이야 말로 사회의 틀을 벗고 새로운 세상을 창조해 가는 유일한 존재이다. 어린아이만이 따분하고 권태로운 세상을 활력이 넘치는 놀이터로 만들며, 사막을 옥토로 바꿀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초인은 어린아이다. 특별한 존재가 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어린아이는 스스로가 초인이 된다. 인간의 본래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초인이다. 인간이 본래 자신이 되려면 낙타에서 사자로, 사자에서 어린아이가 돼야 한다. 그것이 따분한 인생을 활력이 넘치는 축제로 만드는 비결이다.



저작권자 © 전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