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겸 (시인, 한국경기시인협회 이사)
정겸 (시인, 한국경기시인협회 이사)

갑진년(甲辰年) 새해가 밝았다. 세간에서는 힘과 용기, 역동성을 상징하는 청룡(靑龍)의 해라는 점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으며, 우주의 커다란 기운을 한 몸에 받는 한 해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아울러 출발점에 선 사람들은 새로운 도전을 위해 심기일전의 마음으로 불편했던 과거를 다 털어 버리고, 인생 시계를 희망에너지로 돌리겠다며 힘찬 발걸음을 내딛었다. 우리는 늘 이상적 꿈을 계획하며 그 꿈을 이루려는 희망 속에서 삶의 위안을 얻었다. 희망은 어려운 고비를 만날 때마다 큰 원동력이 됐으며 그 힘으로 높은 파고를 헤쳐 나갔다.

그래서 우리는 삶이라는 길고 긴 운명 앞에 아름답고 달콤한 열매가 맺혀지길 희망하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하루하루가 고군분투다. 뿐만 아니라 정신적 물질적으로 더 나은 삶을 추구하는 세상 속에서 각자마다 반짝이는 희망 하나쯤은 가슴속에 품고 살아가야 인생이라는 긴 항로에서 난파선이 되지 않고 목적지에 안착하게 되는 것이다. 희망은 현재의 시간 안에서는 실재하지 않으며 마음속에서 존재 한다. 언제나 미래의 언덕 너머에서 살고 있는 희망은 현재와는 거리가 있다. 그 거리가 멀든 가깝든 희망은 현재와 거리를 두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희망(希望)이란 글자를 한자로 풀어 보면 ‘희(希)’는 점괘를 가리키는 육효(六爻)의 효(爻)와 수건을 뜻하는 건(巾)이 합쳐진 한자어이다. 앞으로의 운수를 알려줄 점괘를 수건이 가리고 있는 형국으로 점괘가 드러나기 전까지는 수건에 가려져 앞을 볼 수 없으며 앞날에 대한 기대를 가지게 된다는 뜻이다. 이러한 이유로 현재라는 시간 속에서 알 수 없는 무형의 세계에 대한 기대감으로 여러 가지 긍정적 상상으로 기다림의 시간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토피아와 샹그릴라에 대한 동경이 희망적 요소로 작용하는 것은 절망 속에서 발견한 별빛 같은 존재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절망은 미래나 과거 시간이 아니라 현재의 시간에서 격어야 할 하나의 과정이다. 즉 절망이 가득한 상태에서는 실낱같은 희망을 간절하게 원하는 것이며 희망은 어쩌면 기쁨보다 소원(所願)에 가깝다고 말을 한다. 절실한 희망을 갖지 않으면 안 되는 배후에도 소원이라는 무형적 믿음이 자리할 수밖에 없으며 희망은 각자가 만들어 낸 의지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절망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희망을 찾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희망은 절망적인 현재 안에서 태양과 같은 존재이다. 희망으로 가득 차 있을 때 아무리 어려움에 처해 있어도 우리는 절망하지 않는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공포 같은 건 염두에 두지 않고. 언젠가는 찬란한 삶이 펼쳐질 것으로 생각하며 절망 자체를 잊는 것이다. 그러나 절망은 현재의 어둠과 미래의 불투명에서 자라나고 절망의 바닥끝에 서 있어 본 자만이 희망을 비로소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바로 그때 희망은 보이지 않는 상상의 세계에서 살아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오는 4월에는 국민 전체의 대표자로서의 지위와 사실상 국민의 주권을 위임받은 제22대 국회의원 선거가 있다. 우리 국민들이 새로 뽑힌 국회의원들에게 바라는 것은 하늘에 있는 달을 따오라는 것도 아니요, 별을 따오라는 것이 아니다. 민의의 전당인 국회에서 제발 싸우지 말고 나라와 국민만 바라보며 선거 때 후보자들 스스로가 내세우는 공약처럼 참된 일꾼이 되어 달라는 것이다. 그냥 우리 국민들이 대통합하여 서로 믿고 의지하며 잘 먹고 잘 사는 나라를 소망하는 것이다. 그리고 어려움에 처한 국민들에게는 희망의 불씨를 키우는 정책을 펼쳐 재도약의 기회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희망가라는 대중가요가 있다 1921년 발표 되어 1930년 대유행했는데 현재도 여러 가수들이 리메이크해 꾸준히 우리 국민들로부터 사랑받고 있다. 아마도 암울했던 일제강점기 시대에 희망을 노래했기 때문인 것 같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로 시작하는데 미래세대인 청소년들의 희망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이제 그들에게 잃어버린 희망을 찾아 주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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