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에너지신산업 중 자리 잡은 몇 안되는 시장제도
‘풍부한 예비력의 시대’ 밀려 가치 인정 제대로 못 받아
화석연료 기반 발전설비 중심으로 한 수급・시장 운영 탓
‘FAST DR’이나 데이터 오픈 통해 새로운 기회 창출해야

지난해 12월 월평균 전력 수요가 8만2176MW로 기존 최고치를 넘어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지난달 23일엔 종전 최대 전력수요를 경신, 9만4509MW를 기록했다.

전력수요가 역대 최고치를 찍은 가운데 지난해 12월 평균 전력 공급 능력은 10만175MW를 기록하며 평균 1만7999MW의 공급예비력과 예비율 21.9%를 나타냈다.

이어 일일 역대 전력 최고치인 23일 역시 예비율은 10%를 웃도는 11.8%를 기록했다.

하지만 전력 수요가 최대치를 기록하는 가운데서도 수요반응(DR, Demand Response) 시장은 여름에 이어 겨울에도 반응하지 못했다.

정부가 정한 신뢰성DR 발령 기준이 6.5GW로 공급 예비력과 크게 차이 났기 때문이다. ‘풍부한 예비력의 시대’는 여전히 계속됐고, 10년 차를 맞이한 DR 업계로선 아쉬운 결과였다. 신뢰성 DR 발령 기준이 6.5GW로 현재 전력 당국이 가진 예비력과 크게 차이 났기 때문이다.

지난해 정부가 전력수급 문제 해결을 위해 발령 기준을 1GW나 높였지만, 발령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861MW, 시작은 미미했다

연도별 DR 수요관리자, 참여사업체, 등록용량 현황 및 경제성DR 감축실적. (제공=이용선 의원실)
연도별 DR 수요관리자, 참여사업체, 등록용량 현황 및 경제성DR 감축실적. (제공=이용선 의원실)

전력 수요관리의 역사는 19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성장 시기 전력 수요가 급증하며 이를 위한 투자 비용이 크게 상승했고, 정부는 최소 비용으로 최적의 전력을 공급하기 위한 다양한 제도를 내놓기 시작했다.

이어 1990년에는 부하 이전 지원 제도가 등장했고 1995년 자율 절전 요금 지원제도, 2002년 비상 절전 제도, 2009년 주간 예고 수요 조정 제도 등 전력 수요를 효율적으로 만들기 위한 다양한 제도들이 시장에 진입하기 시작했다.

현재의 수요반응시장이 본격적으로 열린 건 2014년이다. ‘9·15 블랙아웃’ 사태 이후 공급이 아닌 수요 측면에서 전력을 이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고유가 시대 등을 거치며 에너지효율과 관리의 중요성이 커진 것이다.

결국 전력거래소를 주축으로 2014년 861MW의 자원을 가진 수요자원거래시장(DR)이 본격 출범했다. 이렇게 시작된 DR은 현재 4.5~4.6GW를 넘나드는 전력 산업의 거대한 한 축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여전히 가치는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전력 수요 위기에 발생하는 신뢰성DR은 6.5GW라는 예비력 기준에 막혀 몇 년째 발령 없이 잠자고 있다. 이마저도 지난해 여름 전력수요 피크가 예상되자 5.5GW에서 바뀐 기준이다. 업계에선 “신뢰성DR이 발령 나도 충분히 대비할 수 있고 이제는 효과를 증명할 때”라고 주장하지만 풍부한 예비력의 시대에선 공허한 외침이다.

전력시장에서 발전기와 동일하게 입찰해 고비용 발전기 가동을 대체하고 전력 공급비용을 감소시키는 경제성DR도 아쉬움이 크다. 전력거래소가 설정한 최저입찰가격이 전력도매가격(SMP)보다 높아 입찰 대비 낙찰량이 적기 때문이다. SMP가 300원 가까이 치솟은 전력시장에서도 DR은 한전의 적자 행진을 막는 데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DR이 이끌어온 ‘에너지신산업’

그리드위즈의 전기차 충전기 '도토리'
그리드위즈의 전기차 충전기 '도토리'

하지만 DR은 정부가 추진해 온 수많은 에너지신산업 가운데 제대로 자리 잡은 몇 안 되는 시장 제도로 꼽힌다. 비용은 낮으면서 효용성은 그 무엇보다 높다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제도 또한 타 에너지선진국과 비교해 손색없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나 눈에 띄는 점은 DR로 시작한 에너지신산업 기업들의 성장이다. DR을 베이스로 재생에너지와 전기차, ESS, VPP와 에너지컨설팅까지 에너지신산업의 혁신을 이끄는 첨병 역할을 한 것이다.

대표적으로 그리드위즈가 있다. DR 선두 기업답게 그리드위즈는 초창기 ESS를 비롯해 다양한 비즈니스모델을 선보였으며 전기차 충전기 ‘도토리’로 국제 표준 선점에도 나서고 있다. 또 통신 모뎀은 세계 각지에 수출돼 그리드위즈가 글로벌 선두 기업으로 자리 잡는 데 큰 도움을 줬다. 최근엔 DR 고도화를 위해 제주도를 중심으로 ‘플러스DR’에 공격적으로 나서며 국가 전력 산업 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매니지온도 전기차 충전기를 미래 먹거리로 선정했다. 초기 DR 시장과 함께 성장한 매니지온은 전기차 충전 서비스로 사업을 확장했고 충전기 제조와 소프트웨어 개발, 충전 운영까지 하는 전기차 충전 토털 기업으로 변모 중이다. 기존 DR과의 시너지를 내며 전기차-전력망 연결(V2G) 분야 미래 기업으로 기대받고 있다.

‘에너지쉼표’, 국민DR 대표 기업 파란에너지도 주목받는다. 국민DR을 통해 에너지데이터 확보에 힘써온 파란에너지는 ‘신재생에너지 공유 공동체 전력서비스’ 실증 특례로 이웃 간전력거래에 도전하고 있다. 태양광 등 신재생 자원 보유자가 자가 소비 후 남는 전력을 일반 소비자가 구매하도록 중개하는 상계거래로, 생산과 판매가 하나로 묶이는 전 국민 ‘에너지프로슈머’ 비즈니스 모델을 구축 중이다.

이외에도 아이디알서비스, 에넬엑스코리아, KT, 벽산파워, 파워텍에너지, 헤리트 등이 업계 주요기업으로 에너지신산업의 혁신을 이끌어나가고 있다.

◆창대한 끝 향해 달려가는 DR

DR도 어느덧 10년 차를 맞아 성숙기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어려움은 많다. 꾸준히 지속돼 온 업계 저가경쟁뿐 아니라 정부의 제도 변경에 쉽사리 흔들리기 때문이다. 이미 제대로 된 보조서비스 시장으로 자리 잡은 외국과 달리 국내에선 최근에도 TCF 기준변경과 차등기본정산금 지급 기준 변경 등 제도 탓으로 악화가 계속된다.

업계 전문가들은 악순환의 원인을 화석연료 기반 발전설비를 중심으로 한 수급, 시장운영계획으로 꼽는다. 풍부한 예비력 시대에서 상대적으로 양이 부족한 DR이 우선순위에서 밀리고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실효성을 높이고 가치를 인정받기 위한 다양한 방안 등이 제시되고 있다.

박종배 건국대학교 교수는 신뢰성DR의 고도화를 주장한다. 업계의 현 저가 경쟁은 진입 장벽이 낮은 비즈니스모델에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가 제도를 본떠 만든 PJM처럼 ‘퍼포먼스’ 자체를 중시하고 성과 검증이 이뤄질 수 있도록 기술집약적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고 제시한다.

단기적으로, 직접적으로 주파수 안정에 도움을 주는 ‘FAST DR’ 등이 대표 방안이다. 실제로 한파로 어려움을 겪는 미국 동부 지역은 DR을 중심으로 한 VPP 기업들이 다양한 자원 구성으로 실제 전력 수요 시장 안정에 기여하고 있다.

데이터를 오픈하고 새로운 기회를 창출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류준우 그리드위즈 사장은 “전력거래소에서도 이미 상당한 데이터를 오픈하고 있지만, 기업 입장에서는 여전히 날것 그대로의, 더 촘촘한 데이터가 필요하다”며 “이런 데이터를 활용한다면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기업이 만들어낼 수 있고 장기적으로는 우리가 PJM을 참고해 제도를 만든 것처럼 중진국이 우리를 벤치마킹하고, 국내 에너지기업이 글로벌 에너지컨설팅 기업으로 성장하는 계기로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DR이란? 수요반응이란

전력 수요의 주체가 전기 요금이나 전기 요금 이외의 금전적 유인에 반응해 정상적인 전력 소비 패턴을 조정하는 것으로 도매 전력 시장 가격이 높아 전력 소비를 줄이도록 하거나 계통 신뢰성 확보를 목적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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