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력산업구조개편 이후 중단된 전력시장 선진화…소비자에 선택권 부여 의미
반면 준비 미흡 선진화에 ‘성급한 제도’ 지적도…직접구매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전 누적부채 200조원 부담은 누가…남은 이들 부담 커지는 부작용 해소 필요

전력 직접구매제도가 본격화할 조짐을 보이며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나뉘고 있다. 다만 이들은 공통적으로 한전의 200조원에 달하는 누적부채를 부담해야 하는 남은 전력수용가를 위한 형평성을 중요한 과제로 꼽았다.[사진=연합뉴스]
전력 직접구매제도가 본격화할 조짐을 보이며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나뉘고 있다. 다만 이들은 공통적으로 한전의 200조원에 달하는 누적부채를 부담해야 하는 남은 전력수용가를 위한 형평성을 중요한 과제로 꼽았다.[사진=연합뉴스]

전기사업법 안에서 오랜 시간 잠들어 있던 직접구매제도가 최근 도마 위에 올랐다.

산업통상자원부 산하 전기위원회가 최근 회의에서 직접거래의 계약기간을 기존 1년에서 3년으로 늘리는 전력시장 규칙개정안에 대한 심의를 연기하면서, 정부가 해당 제도에 대한 부담을 느끼는 게 아니냐는 시각이 적지 않다. 전력직접거래가 정부 승인을 받아야 하는 제도는 아니지만, 국내 전력시장 역사상 첫 사례인만큼 직접거래를 준비 중인 SK어드밴스드도 이번 개정안이 마무리된 뒤에야 한전 시장 이탈을 시도할 것으로 보이는 탓이다.

정부가 지난해 4분기 한전의 산업용 전기요금을 평균 9.7% 인상키로 하면서 대규모 전력 수용가들의 한전 시장 이탈 조짐이 보이고 있다. 전기요금을 인상했어야 할 골든타임을 정부가 놓친 탓에 이 같은 사태가 발생했다는 게 업계 일각의 평가다. 이 가운데 규칙개정이 진행되면 본격적인 직접거래가 진행될 것이 자명한 만큼 산업부가 섣불리 규칙개정을 마무리짓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업계는 입을 모은다.

계약전력 3만kVA 이상의 대규모 전력 사용자에게 허용된 직접구매제도를 두고 업계 전문가들의 시각도 나뉘고 있다. 그동안 시장 환경 변화에도 지지부진했던 시장 선진화를 위한 첫 작업이 될 것이라는 긍정적 평가와 함께 아직 준비가 안 됐다는 목소리가 나뉜다.

이들의 목소리를 종합했을 때 우리 전력시장의 선진화는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다만 그 초석으로 볼 직접구매제도가 지금 상태에서 적절한 제도인가에는 물음표도 남는다. 아울러 ‘형평성’이라는 키워드는 앞으로 정부가 풀어가야 할 중요한 숙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소비자에 선택권 주는 시장 재도약 기점=전력산업 전문가 일각에서는 이번 직접구매제도를 두고 그동안 멈춰있었던 전력시장 선진화를 풀어낼 키(Key)로 보고 있다.

과거 전력산업 구조개편 당시 우리 정부는 그동안 한전이 전담했던 발·송·배전을 분리해 경쟁체제로 전환한다는 방침이었지만, 이 계획은 발전 부문의 분리까지만 진행된채 지금까지 멈춰왔다.

그러나 직접구매제도가 활성화되면 전력 소비자들에게 선택권이 강화된다. 아직까지는 한정적이지만 일부 사용자가 전기요금과 효율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새로운 판매사업자를 선택할 수 있게 되는 것.

최근 벌어지는 직접구매제도 역시 전기요금과 최근 연료비 사이에서 더 효율적이고 저렴한 전력을 찾아 소비자가 이동하는 것이기 때문에 더 의미있다는 얘기다.

지난해 4분기 전력요금 인상으로 인해 산업용 요금은 kWh당 182원 가량으로 높아졌다. 요금은 계속해서 상승하는 반면 전력거래소가 제공하는 전력통계정보시스템(EPSIS)에 따르면 연료비(가스)는 최근 2년여간 90만~110만원 수준으로 박스권에 형성돼있는 만큼 더 저렴한 가격에 전기를 공급받을 수 있다.

시장원칙에 따라 소비자들이 이동할 수 있는 시스템이 만들어진다는 얘기다.

박종배 건국대학교 교수는 본지와 통화에서 “판매 경쟁 여부와 관계없이 대부분의 국가들이 직접구매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우리 역시 기존부터 전기사업법에 있던 제도”라며 “이를 통해 소비자의 선택권을 보장한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김성수 한국공학대학교 교수도 “일각에서 제기하는 체리피킹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겠지만, 그동안 우리 전력시장에 경쟁이랄 게 거의 없지 않았나. 직접구매제도가 이 같은 경쟁이 되는 기반인건 사실”이라면서도 “최근 시작된 논의가 시장을 정비하는 동력으로 작용하길 바란다”고 전했다.

◆아직 준비 안된 시장 선진화…직접구매제 신중해야”=반면 우리 전력시장이 아직 선진화되지 않은만큼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전력시장에서 소비자에게 선택권을 주는 등의 선진화는 동의하지만, 아직 선진화 작업이 마무리되지 않은 상황에서의 부작용을 함께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정부가 전력시장에 도입할 계획인 양방향 입찰 등을 꼽을 수 있다.

산업부는 지난해 5월 열린 ‘제31차 에너지위원회’에서 전력시장 가격 결정에 판매사업자 뿐 아니라 소비자도 참여하게끔 하는 양방향입찰(수요입찰제)을 도입하겠다는 계획을 담은 ‘전력시장 제도개선 방향’을 발표한 바 있다.

양방향입찰은 그동안 판매사업자로부터 단방향으로 진행된 가격 결정을 수요측까지 더해 양방향으로 결정하는 제도다. 시간대별 전력수요에 따라 소비자들이 가격을 결정할 수 있기 때문에 전력시장 효율화에 기여할 수 있다.

다만 이 제도 도입까지 아직 시간이 필요한 상황에 대규모 전력수용가들이 직접거래 시장으로 이탈할 경우 추후 선진화된 시장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할 플레이어들을 제외하는 모습이 된다. 양방향입찰이 도입된 뒤 이들을 입찰에 참여시킬 수 있을지도 미지수라는 얘기다.

이와 관련 직접구매제에 앞서 이 같은 부작용을 면밀히 도출하고, 대비해야 한다는 전문가들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정연제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교수는 “전력시장 선진화를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필요하다”면서도 “그러나 전력을 직접거래한다고 해서 갑자기 선진화라고 부르는 게 맞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최근 논의되는 직접거래제는 가격경쟁이나 효율화 등과는 관계없이 단순히 한전에서 전력공급자를 갈아타는 것 뿐”이라며 “해외처럼 서로 경쟁할 수 있는 판매사업자가 있는 것도 아니다. 더군다나 정부가 도입코자 하는 양방향입찰과 같은 선진화 계획이 있는데, 지금 한전을 빠져나간 전력수용가들이 새로운 제도에 들어오려 하겠나”라고 덧붙였다.

◆결국 한전 남은 고객에 전가되는 부담…형평성 챙겨야=직접구매제에 적극 나서야 한다거나, 신중해야 한다는 전문가들이 공통적으로 제기하는 문제는 형평성이다.

전기요금 인상에 맞춰 한전시장을 벗어나는 전력수용가가 있는가 하면 남는 소비자들도 있는 탓이다. 직접구매제는 계약전력 3만kVA 이상의 수용가들이 참여할 수 있기 때문에 일반 가정용 소비자나 기준 미만의 계약전력을 사용하는 산업용 소비자들은 한전을 벗어날 수 없다.

문제는 이번 전기요금 인상이 한전의 누적적자 해소를 위한 것이라는 점이다. 지난 2021년부터 시작된 에너지위기와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사태로 촉발된 글로벌 연료비 인상은 전세계 에너지 가격을 대폭 인상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대표적으로 영국의 경우 2022년 평균 에너지비용이 연간 2316파운드(약 417만원)에 달했으며, 이는 전년대비 74% 늘어난 수치다. 이 시기 영국에서는 소위 ‘에너지빈곤층’ 문제가 중요한 이슈로 다뤄졌다.

반면 한국의 경우 2022년 인상된 전기요금은 kWh당 20원이 채 되지 못했다. 같은 해 오른 한전의 도매전력요금만 전년대비 100원/kWh가 넘었지만 이 같은 연료비를 모두 반영할 경우 국내 경제에 큰 타격이 있을 것으로 판단한 국회와 정부가 전기요금 인상을 제한한 탓이다.

정부는 전기요금 인상곡선을 완만하게 그리는 전략을 수립한 것으로 보인다. 분기별로 전기요금을 소폭 인상시키며 충격을 완화, 200조원 이상이 쌓인 한전의 누적부채를 해소하겠다는 것.

지난해 4분기 진행된 산업용 전기요금 인상도 이 같은 개념에서다. 2022년 쌓인 막대한 누적부채를 이제는 해소해야 할 때가 됐지만, 오히려 대규모 수용가들이 직접구매제 등을 활용해 한전 시장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정연제 교수는 이 같은 문제를 두고 “한전을 위해서가 아니라 한전의 부채를 부담해야 할 남은 고객들을 위해서라도, 직접구매제를 이용하는 이들에게도 일부 리스크가 있어야 한다”며 “여태껏 한전더러 모든 적자를 떠안으라고 했다가, 이제와서 소비자들이 빠져나가는 건 잘못된 것”이라고 꼬집었다.

이 같은 움직임이 본격화되면 결국 한전의 부채라는 부담은 남은 소비자들에게만 전가되는 탓이다. 전력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한 불공평을 어떻게 해소하느냐가 중요한 과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박종배 교수 역시 “전력시장 선진화 차원에서 직접구매제는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면서도 “그러나 빠져나가는 소비자와 남아있는 소비자 사이에서 이는 공평한가를 고민해야 한다. 한전의 부채 뿐 아니라 다양한 비용들이 있을 것인 만큼 형평성은 체크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성수 교수도 “핵심적인 문제는 200조원이라는 한전의 부채를 누구에게 걷을 것인가”라며 “직접구매제가 수면 위로 떠오른 지금 반드시 논의하고 정비해야 할 일”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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