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공=착한자본의탄생
제공=착한자본의탄생

한국전력 김동철 사장의 취임사와 신년사를 보면 일관성이 있다. 약 100여 일의 차이가 있지만 핵심 키워드는 같다. ‘체질을 혁신하자, 포스코·KT·ENEL과 같은 회사로 거듭나자, 원전 수출에서 활로를 찾자, 에너지 신산업과 신기술 생태계를 주도하자’는 점이 공통점이다.

김 사장은 한전이나 전력업계에 종사하지 않았기에 전기에 관한 한 순백(純白)한 분이다. 정치인 김동철은 아주 좋은 이미지로 남아있다. 그의 이력 중에 필자가 주목하는 부분은 첫 직장이 한국산업은행(산은)이라는 점이다. 금융 중에서도 산은은 비료와 같았다. 단순한 자금 융통이 아니라 무언가 결실을 나오게 만드는 영양소 같은 역할을 했다. 이런 성향은 정치인 김동철에게 그대로 이어졌다. 2018년 2월 국회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 “레미제라블의 작가 빅토르 위고는 ‘램프를 만들어 낸 것이 어둠이었고 나침반을 만들어 낸 것은 안개였다”고 했다.  화려한 외양을 쫓거나 한계에 굴복하기 보다는 허들을 극복(해결)하는 데 더 주목하는 인물이란 생각이 든다.  

그러나 20여 년 이상 전력산업과 한전을 지켜본 필자의 입장에서 김동철 사장에 대한 기대와 우려가 교차하고 있다. 우선 기대는 처음으로 한전 역사상 첫 정치인 출신 사장이라는 점이다. 새로운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취임사에서 포스코·KT·ENEL을 주목한 것은 전력산업에 순백한 분이 아니면 알아도 공개를 못했다. 신년사에서 다시 강조한 것을 보면 확신을 가지고 있다고 보인다. 

우려 점은 너무 많다. 한전의 독점이 너무 오랫동안 지속되다 보니 전력생태계가 한전을 중심으로 굳어졌다. 그 결과 원(元) 뿌리만 있고 곁뿌리가 자라나질 못했다. 그동안 한전은 전력산업의 시장과 상품적 특성을 활용하면서 나름대로 주어진 역할을 잘 수행했다. 

덕분에 우리는 그동안 값싼 전기를 마음껏 사용해왔다. 그런데 계속 그렇게 갈 수는 없게 됐다. 탄소중립 시대라는 에너지 패러다임 시프트가 도래했다. 치열한 경쟁을 통한 전력 산업은 없고 전력 독점 기업만 있다 보니 변화를 리딩하기는 커녕 적응도 못하고 있다. 시장의 경쟁을 통한 다양한 가치사슬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 독점 기업에 충성하는 납품사만 존재하게 됐다. 독점 기업의 논리를 산업의 논리로 인식하게 됐다. 급기야 우-러 전쟁을 겪으면서 원(元) 뿌리가 썩어들어가고 있다. 알면서도 치료가 불가능하다. 전형적인 우물 안 개구리가 됐다. 독점에 안주하다 보니 감각이 둔해져서 미지근한 물에 살이 익어가는 줄을 모르고 있고, 우물 턱이 높아진 줄도 몰라 이제는 튀어 나갈 수도 없다.

포스코·KT·ENEL의 공통점은 치열한 시장경쟁에서 살아남았다는 점이다. 그 중에서도 포스코의 사례는 한전의 미래를 설계하는데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첫째 시장 특성이다. 포스코는 치열한 경쟁에 노출돼 있다. 철강 제품의 수출입이 자유롭다 보니 전 세계 시장을 상대로 경쟁을 해야 한다. 반면에 한전은 국내 독점에다가 수입도 안 되는 상품을 판매하고 있다. 

둘째 상품의 특성이다. 포스코는 국내외 다양한 고객으로부터 다양한 품질과 규격의 상품을 요청받고 있다. 고객의 요구 조건은 점점 더 까다로워지고 있다. 50년이 넘는 연구개발 누적에도 매년 특허 건수가 늘어나고 있다. 이는 매년 고객별, 상품별 품질과 가격이 다양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에 한전의 상품인 전기는 전기일 뿐이다. 정전 예방과 일정한 전압관리만 하면 된다. 즉, 모든 고객에게 제공하는 상품의 차별화 요인이 없다.  

셋째 소비자 구조도 중요한 차이 요인이다. 포스코의 소비자는 모두 중간 소비자이다. 한전의 소비자는 다양하다. 모든 산업과 국민이 필요로 하고, 어디에나 항상 있어야 하는 게 한전의 상품인 전기다. 고객은 대기업부터 개별 소비자까지 다양한데 상품의 차별화 요인은 없고 가격만 있다 보니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민원이 발생하게 된다. 그 결과 ‘전기’요금이 ‘정치’요금이 되었다. 

넷째는 혁신의 욕구(motivation)다. 포스코는 전 세계 철강사와 치열한 경쟁을 하다 보니 혁신하지 않으면 살아날 수가 없는 구조다. 반면, 한전은 총괄원가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내부적으로 비용을 절감할 유인 동기가 없다. 

그런데 포스코의 진면목은 2010년부터 시작된 현대제철과의 경쟁에서 나타났다. 2005년 현대제철이 당진제철소 건설을 선언하자 포스코는 차별화 전략에 들어갔다. 최고의 기술 경쟁력 장(場)인 자동차 강판 ‘시장 조성’에 집중했다. 그 결과는 역설적이게도 현대제철이 시장에 진입하면서 입증되었다. 2010년부터 현재까지 월드스틸다이나믹스(WSD)로부터 14년 연속 세계 최고의 경쟁력있는 철강회사로 평가받고 있다. 중요한 것은 내가 힘이 있을 때 철저히 준비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점이다. (<착한자본의 탄생> 참조)  

그러나 한전에는 포스코 이상으로 인재가 넘치지만 포스코와 같은 변신을 할 수 있는 기회(계기)가 가능할지는 의문이다. 첫째는 현재의 한전을 즐기는 고객이 너무 많다. 적자 대책은 한전과 국가가 알아서 하고 소비자는 계속 최고 품질의 전기를 싸게 사용하는데 맛이 들어있다. 문제는 ‘제한된 정보’에 길들여진 얌전한 고객들이라 한전이 위기에 처해도 도움이 못 된다.

둘째는 우군이 없다. 현 정부 출범시 국정과제에 포함했던 전기위원회 독립성·전문성 강화도 벌써 잊혀졌다. 우수하지만 공기업 직원의 독특한 DNA(돌파·개척 보다 안정적 관리자)도 걸림돌이다. 학계 인사들도 독점이 오래 지속되다 보니 의견은 있으나 ‘주장’을 못한다. 정부 관료도 2년마다 보직이 바뀌다 보니 있을 때 정전이나 요금 이슈만 걱정한다. 언론 기자들도 2년마다 교체되다 보니 SMP의 문제점도 이해를 못하고 바뀐다. 시민단체는 소비자 행동변화를 촉구하기 보다 전력 집행 기업을 탓하고 있다.   

셋째는 권한이 없다. 정말로 권한이 없다. 발전자회사 지분이 100%지만 숫자에 불과하다. 연료를 선택할 권한도, 판매단가를 결정할 권한도, 시장제도를 변경할 권한도 없다. 분산에너지법이 곧 시행되지만 시장 활성화를 위한 한전의 역할도 제한적이다. 시장을 키우기 보다 손해를 보면 안 되기 때문이다. 어둠과 안개뿐인데 있는 것은 책임 뿐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정치인 출신 김동철 사장은 남다른 비책이 있을 것이지만 받쳐줄 세력(시장과 인재)이 필요하다. 언젠가 기회가 왔을 때 주도적으로 개혁을 추진할 수 있도록 지각에 균열을 내는 작업을 해놓아야 한다. 민영화가 아니라 시장 개방이다. 그래야 ‘정치’요금에서 벗어나 소매가격이 움직인다.

첫째는 정보 공개다. 전력거래소와 함께 다양한 정보를 체계적·정기적으로 공개해서 이해관계자들의 행동 변화를 유도해야 한다. 김 사장은 재생에너지 시대를 맞아 에너지 신사업과 신기술 생태계를 주도하겠다고 했다. 제주도 시범사업과 분산에너지 특화지역 운영 데이터 공개는 정말 중요하다. 정보 독점은 우물을 깊게만 할 뿐 시장을 키우지 못한다. 포스코는 경쟁체제에 대비 평범한 철판을 ‘자동차 강판’이라는 상품 브랜드로 시장을 만들고 개척했다. 분산전력 시대를 맞아 탄소비용과 송전 등 사회적 비용을 고려해 제품에 ‘가치를 입증할 이름’을 붙이고 시장을 형성해야 한다. 내가 힘이 있을 때 잠재적 경쟁자를 키우는 것은 나를 위한 길이다. 아시아나항공도 대한한공의 품으로 돌아왔다. 

둘째는 요로(要路)에 인재를 심고 키워야 한다. 김재익 수석은 문희갑, 강경식, 김기환, 김만제, 박영철, 사공일 같은 우군들이 있었기에 당시는 물론 그 이후의 대한민국 경제를 레벨업 시킬 수 있었다. 이들이 램프와 나침판을 만들어 낼 것이다. 

김경식 ESG네트워크 대표 <착한 자본의 탄생> 저자 

관련기사

저작권자 © 전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