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기차 충전기, 데이터센터 UPS, LED 조명 등 인버터 기반의 비선형 부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국내 전력계통은 심각한 위협에 직면해 있다. 국내 전력망에서만 연간 최대 6.4TWh의 숨겨진 에너지 손실이 발생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IEEE, EPRI 등 국제 연구기관이 고조파 관리 미흡 시 전체 전력망 손실률이 1~5% 증가할 수 있다고 경고한 자료와, 국내 비선형 부하 실태를 토대로 산정된 현실적 수치다. 이로 인한 손실은 단순한 효율 저하를 넘어 송·배전 설비의 수명 단축, 변압기 과열, 보호장치 오동작, 케이블 절연 열화 등 심각한 전력 품질 저하로 이어진다. 결국 국가 에너지 낭비와 사회경제적 부담이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다.
현행 제도는 주로 154kV 등 특고압 설비 중심 관리체계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실제 고조파 발생의 대부분은 EV 충전기, 산업용 인버터, 상업시설 등 배전급 이하 저압 수용가에서 집중된다. 이 구간은 공용연계점(PCC)에서 전압 왜곡을 확산시키는 주요 원인이지만, 제도적 안전망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고조파 유출·입에 대한 책임 규정, 측정 및 감독 절차가 명확히 부재한 탓에 현장의 피해는 누적되고 있다. 결국 수용가 간 형평성은 무너지고, 국가 전력 품질의 신뢰성까지 흔들리고 있다.
반면 해외 주요국은 이미 고조파 문제를 산업 경쟁력과 직결된 국가 인프라 과제로 인식하고 있다. 미국은 IEEE Std.519, 영국은 G5/5, 유럽은 EN 50160 등을 법제화해 허용치, 측정, 제재 체계를 명확히 규정하고 있다. 반면 국내는 KEPCO 내규나 KEPIC의 자율 기준에 머물러 실효성이 낮다. 산업계 보고서에 따르면 실질적 관리가 결여될 경우 전력망 손실이 최대 5%, 변압기 손실은 최대 24%까지 증가할 수 있다. 이제 우리도 자율 관리의 한계를 넘어, 국가적 차원의 제도화가 불가피하다.
고조파 관리 법제화는 규제가 아니라 국가 전력 인프라의 안정적 운영을 위한 기술적 안전장치다.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은 단계적 로드맵을 제안한다.
첫째, IEEE Std.519를 IDT(동일 적용) 방식으로 KEPIC-H 코드에 신속히 편입하고, 이를 KEC 및 산업부 고시에 반영해 법적 강제력을 확보해야 한다.
둘째, 100kVA~1000kVA 이상 중대형 수용가를 중심으로 설비용량별 허용치(TDD)와 책임 주체를 명확히 하고, EV 충전기·ESS 등 신규 비선형 부하에는 고조파 등급제를 도입해야 한다.
셋째, 공인 검사기관의 정기검사 항목에 고조파 준수 여부를 포함하고, 위반 수용가에 대해 개선 명령과 패널티 제도를 병행함으로써 제도의 실효성을 강화해야 한다.
고조파 관리 법제화는 연 6.4TWh에 달하는 에너지 손실을 줄이는 동시에, 국가 전력망의 안정성과 산업 경쟁력을 지키는 핵심 전략이다. 전력 품질은 더 이상 기술적 부속 개념이 아니라, 대한민국 산업의 신뢰도를 결정짓는 핵심 자산이다. 정부, 한전, 산업계 모두가 전력 품질 확보를 국가 에너지 안보의 최우선 과제로 인식하고, 배전급 이하 고조파 관리 체계를 시급히 제도화해야 한다. 지금이 바로, 미래 전력망의 지속 가능한 경쟁력을 위한 결단의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