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9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9)에서 체결된 ‘에너지저장 및 그리드 협약’ 에서는 2030년까지 ESS를 1,500GW로 확대하고, 2040년까지 8,000만km 이상의 송·배전망을 새로 깔거나 교체하겠다는 목표를 내걸었다. 이제는 재생에너지를 설치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이를 수용할 수 있는 안정적인 전력망 구축과 저장장치의 확대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대규모 발전단지와 소규모 재생에너지 발전기들이 생산한 전력이 송전망 부족과 안정도 문제로 부하로 전송되지 못하는 상황이 빈번하며, 향후 수도권에는 반도체 클러스터와 데이터센터와 같은 대규모 신규 부하가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기에 이러한 어려움은 더욱 가중될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중앙집중형 전력망이 가진 한계가 드러나자, 전 세계적으로 지역에서 생산하고 지역에서 소비하는 분산에너지 시스템이 주목받고 있다. 우리나라는 지난해 6월 ‘분산에너지 특별법’을 시행하면서 제도적 토대를 마련하였고. 최근 산업부에서 분산에너지 특화지역을 지정하고, 마이크로그리드 기반의 차세대 전력망 구축 계획도 내놓았다. 목표는 명확하다. 전력을 원거리에서 생산해서 장거리로 보내는 방식에서 벗어나, 전력 수요지 인근에서 직접 생산하고 소비하는 체계로 전환하겠다는 것이다.
지난달 한전이 발표한 제1차 장기배전계획에서는 2024년 말까지 약 25.5GW였던 배전망 연계 분산에너지 용량이 2028년 말에 36.6GW에 이를 것으로 예상하였다. 대부분은 태양광 발전이며, 풍력과 ESS, 그리고 여기에 전기차 충전 인프라, 소규모 열병합발전, 히트펌프, 심지어 AI 데이터센터 부하까지 더해지고 있다. 이에 따라 배전망은 이미 과거의 단순한 전기 배달의 역할에서, 수급균형, 전력 거래, 유연성 자원 운영까지 아우르는 소규모 전력계통으로 변화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앞으로는 대규모 발전소에서 부하까지 전기를 전송하는 송전의 역할과 각 부하에 전기를 배달해주는 배전의 역할 구분이 모호해진다는 것이다. 발전과 부하가 지역 곳곳에 혼재하는 분산에너지 시대에는, 대규모 광역망과 여러 개의 지역망이 서로 엮이며 전력의 흐름을 더욱 유연하게 주고받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나아가야 한다. 전력계통을 ‘광역망과 지역망’이라는 다층적인 구조로 재정의하고, 발전과 부하가 같은 지역 내에 다수 존재하는 현실을 반영한 제도와 운영 시스템이 필요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DSO (Distribution System Operator, 배전계통운영자)의 필요성이 대두된다. 향후 배전망에 접속될 다수의 발전원과 저장장치 그리고 부하들을 통해 지역유연성을 공급하고, 이들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정하면서 능동적으로 배전계통 운영에 참여시키려면 배전계통을 공정하게 운영할 수 있는 DSO 체제가 가장 효과적이다. 해외에서는 이미 DSO가 배전망의 중립적 운영자이자 조정자로 자리 잡았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지난해 11월, 한전이 공식적으로 DSO 역할을 하겠다고 선언한 상태이다.
또한 최근에는 한전과 전력거래소 등 여러 기관에 분산되어 있던 송·배전망 운영 정보를 실시간으로 연계하고 통합하여, 재생에너지의 출력 변동과 부하 변동에 즉각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시스템이 구축되었다. 이러한 실시간 관제 체계는 TSO (Transmission System Operator, 송전계통운영자)와 DSO 협조운영의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의 고도화를 위해 산학연이 모여 TSO/DSO 협조운영 워킹그룹을 신설하고 우리나라에 적합한 협조운영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이제는 단순히 ‘필요하다’는 논의 수준을 넘어서, ‘어떻게 설계하고 운영할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논의해야 하는 시점이다. 배전망에 연계되는 다양한 자원들로 인해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는 배전망의 효율적 운영을 위해서는, DSO를 중심에 둔 전력계통 운영체제 개편이 필요하다. 광역 송전망과 지역 배전망이 TSO와 DSO를 통해 유기적으로 협력하는 동반자 체계를 통해 재생에너지에 기반한 안정적인 전력망 운영과 혁신이 가능할 것이다.
새 정부는 ‘에너지고속도로’, ‘RE100 산업단지’, ‘마이크로그리드 기반의 차세대 전력망’ 등을 주요 에너지 정책 목표로 내세우고 있다. 기존 송배전망 확충만으로는 재생에너지 확대와 전기화에 따른 수요 증가에 대응하기 어렵기 때문에, 분산화와 유연성 확보를 병행하는 전략이다. 풍부한 재생에너지 잠재력이 있으나 계통운영상 여러 문제를 안고 있는 전남권에서 DSO 기반의 지역전력망 운영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통해, 지역 유연성 시장, NWAs (Non-Wires Alternatives, 비증설대안)와 그린허브스테이션 등 미래를 바꿀 혁신 기술들이 펼쳐지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