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길은 없다. 그러나 언젠가 가야할 길이다”

2009년 DC배전 플랫폼 구축 연구 등으로 타당성 및 경제성 확인
한전, 시범선로·독립섬 실증사업, 장차 ‘스마트 DC아일랜드’까지 구상
DC기반 신재생 발전원·디지털부하 확대추세, AC·DC 혼용 불가피
제조업계 “아직 시장 없다” 관망 속에 진입기회 찾기 위해 상황주시

국내에서 직류배전(이하 DC배전) 연구가 본 궤도에 오른 것은 지난 2009년이다.

한전은 정부과제로 ‘스마트 배전시스템’을 개발하면서 DC배전의 잠재력에 주목하고, ‘DC배전 플랫폼 구축을 위한 타당성 연구’를 진행했다. 이는 당시 전력산업 최대의 이슈였던 스마트그리드 실증사업보다 앞선 행보였다.

직류배전(이하 DC배전)은 디지털 가전, 컴퓨터, 전기차, ESS, 인터넷데이터센터(IDC) 등 직류설비에 DC전력을 직접 공급하거나 AC를 DC로 전환해 전송하는 배전방식이다. AC 기반의 국내 전력계통

에 신재생에너지, DC부하가 연계되면서 나타나는 전력변환 손실을 5~20% 가량 줄일 수 있는 기술이다.

한전은 타당성 연구를 통해 DC배전 방식이 기존 AC 방식보다 초기투자비는 비싸지만 운영과정에서 선로손실을 줄일 수 있어 경제적으로 더 유리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또 경제성을 확보하기 위해선 DC부하기기뿐만 아니라 신재생에너지, 전기자동차 등 DC전원 보급이 함께 이루어져야 하며, DC배전의 경제성을 좌우하는 핵심요소는 전력변환장치의 가격과 효율이라는 사실을 파악했다.

이 같은 결론은 한전이 2010년 자체적으로 ‘DC배전 표준모델 설계 및 핵심기술 개발전략 수립연구’를 수행하는 직접적인 동기가 됐다. 이 연구는 수용가가 아닌 배전계통 건설·운영자 관점에서 DC배전의 타당성을 다시 분석하고, 어떤 현장에 적용해야 최상의 효과를 얻을 수 있는지 파악하기 위해 추진됐다.

한전은 이를 통해 구체적으로 직류 신재생에너지원, 전기차 급속충전의 계통연계 시 전력품질 문제해결에 DC배전을 적용할 수 있으며, 장거리 저부하 선로 공급방식을 MVAC(특고압교류배전)에서 1500V 이하 LVDC(저압직류배전)로 전환하면 투자비 절감과 전기품질 제고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한전 DC배전 ‘퍼스트무버’ 목표

한전이 2016년 8월 국내 최초로 저부하(50kW), 장거리(1~2km) 지역이면서 수목접촉, 산악장거리 지형, 저압 저전압 등의 특징을 지닌 광주 계림변전소 망월 배전선로(D/L) 등 5개 D/L에 DC배전 실선로를 구축(저압 직류배전 실증인프라 구축 및 실계통 적용 연구)한 것은 이런 확신을 증명해 보이기 위한 첫걸음이었다.

DC배전 실선로는 정류기(전원측)와 인버터(부하측)를 장착해 기존의 AC 13.2kV 특고압 선로를 DC 750V 저압 배전선로로 전환한 것으로, 이번 시범사업은 올해 9월 종료된다.

김주용 한전 전력연구원 배전ICT그룹 책임연구원은 “모든 게 처음이었기 때문에 DC배전 실선로를 구축하면서 규격, 기준을 자체적으로 만들었고, 그 과정에서 시행착오도 많았다”면서 “특히 가장 큰 난제는 전력변환기였는데, 우리도 필요한 성능만 제시할 수밖에 없었고 기업들도 개발경험이 없어서 어려움이 많았지만, 지금은 보호동작 시 원인을 찾아내 선로가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밝혔다.

같은 그룹의 조진태 선임연구원은 “시범사업 이후에는 확대적용 여부를 심의하게 될 것”이라며 “실무자 입장에선 이번 사업이 성공적이라고 평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희대 한전 배전계획처 차장은 “DC배전 실선로 시범사업은 한전이 업계에 LVDC를 보급하겠다는 시그널을 줬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한전은 계통이 독립된 섬 지역에 세계 최고 수준의 저압 DC배전망 실증사이트를 구축하기 위해 진도 서거차도에서 ‘DC 독립섬 실증사업’도 추진하고 있다.

한전 예산으로 추진되고 있는 이 프로젝트는 올해까지 인프라가 구축되고, 내년 7월 실증이 완료된다. 독립섬에 저압 직류배전망 실증사이트를 구축한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국내·외에 DC 마이크로그리드를 홍보하고, LVDC 관련 기술을 완성한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고 한전은 강조했다.

2020년 이후 특고압과 저압 쪽에서 AC와 DC 혼용을 목표로 하고 있는 한전은 이들 사업을 통해 2018년에는 DC배전 기자재 제작시스템과 운영시스템 측면에서 글로벌 톱 수준의 기술과 노하우를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한전은 이외에도 DC배전에 대한 기술 확보와 인프라 구축을 위해 단계적으로 ▲DC 공급약관 규정확보 ▲해외 공동연구 및 개발협력 ▲스마트 DC홈 빌리지 조성 ▲특고압 DC기술개발 ▲DC보급확대 기반 마련 ▲해외 DC 마이크로그리드 수출 ▲특고압 DC전력공급 상업화 ▲스마트 DC 아일랜드 구축 등을 추진한다는 복안이다.

정 차장은 “AC 기술은 해외에서 이미 개발이 끝난 뒤 국내 계통에 적용됐고, 대용량 발전전력의 장거리 송전을 위한 HVDC기술도 마찬가지였다”면서 “그러나 LVDC만큼은 아직 상용화가 안됐고, 우리가 먼저 치고 나가면 향후 글로벌 DC배전 시장에서 퍼스트무버가 될 수 있다”고 밝혔다.

향후 시장은 존재, 개화시기는 ‘물음표’

한전이 DC배전 기술 확보와 인프라 구축에 속도를 내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 이유는 DC전원 공급을 원하는 수용가의 요청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향후 전기차, ESS 등 직류설비 보급이 빨라질수록 이 같은 요청은 봇물을 이룰 공산이 크다.

두 번째 이유는 한전 스스로의 필요성이다. 즉 배전계통을 건설·운영하는 한전이 DC배전망을 갖출 경우 경제성을 확보할 수 있는 시대가 조만간 도래한다는 얘기다.

김 책임연구원은 “한전의 배전 저압선로에 전기차, ESS, 태양광 등 직류설비가 계속 연계되면 큰 틀에서 한전 계통도 직류설비를 갖춘 수용가 구내와 동일한 환경이 된다. 따라서 전력품질 문제해결 등을 위해 DC배전망을 확대한다면 경제성을 확보할 수 있다”며 “앞으로 이런 DC배전망이 많아지면 관련된 업체들도 늘어나고, 시장도 커질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그는 “아직 비용적인 부담이 있을 뿐이지 이미 DC배전 시대는 도래했다”면서 “다만 앞으로 이 시장이 얼마나 빠른 속도로 커질 것인가는 아직 물음표인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이 같은 한전 행보와 달리 DC배전 시장을 바라보는 제조업계의 입장이 다소 유보적인 것은 결국 시장형성의 시기문제와 직결된다.

기업 입장에서는 아직 뚜렷한 DC배전 시장이 없는 만큼 본격적으로 뛰어들 명분도, 기회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KT가 IDC 구내를 대상으로 DC배전(380V) 실증사업을 전개한 바 있고, 케이디파워가 K-MEG사업 일환으로 서울대에 직류배전 실증사이트를 구축하고 직류전원을 건물에 공급할 수 있는 직류배전설비시스템을 개발했지만 이는 극히 일부 기업의 사례일 뿐 대다수 기업들은 시장상황을 관망하고 있다.

한 제조업체 관계자는 “DC배전에 대해 관심은 많다. 향후 일정한 시장이 만들어질 것이라는 기대감도 있다”면서 “하지만 기업 입장에선 지금 당장 시장이나 이익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뛰어들 수 있는데, 아직은 그 타이밍을 찾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 차장은 “신재생에너지 등 DC설비와 부하가 계속 늘어나기 때문에 DC배전도 분명 방향은 맞는데, 시장이 언제 열릴지는 알 수 없다”면서 “물론 (한전이) 사업을 촉진하고, 시그널을 계속주면 그 시기는 앞당겨질 수 있겠지만 정확한 계획이 명확히 정리돼야 기업들이 따라올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인터뷰-김주용 한전 전력연구원 배전ICT그룹 책임연구원

“정부도 가세해 동시다발적 준비로 DC배전 판 키워야”

“DC배전 시대를 앞두고 기업이 무엇을 준비해야 하고,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에 관해 많은 질문을 받습니다. 그때마다 내놓는 답변은 ‘현재 갖고 있는 기술과 솔루션으로 DC배전에 적용할 수 있는 분야를 우선 찾아라’는 것입니다.”

한전 전력연구원에서 DC배전 실선로 구축사업을 관장하고 있는 김주용 배전ICT그룹 책임연구원은 DC배전 시대를 대비한 기업들의 선제적인 대응 필요성을 강조했다.

“아직 시장이 없어서 당장 기업들이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닙니다. 그러나 DC배전에 관심이 있다면 자신의 기술, 솔루션을 갖고 DC배전시장에서 활용할 수 있는 분야를 찾아야 합니다.”

김 연구원은 현재 특별한 솔루션이 없다면 장기적으로 전력변환기 쪽에 접목할 수 있는 소재, 기술 등을 준비해보는 것도 유용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전력회사 입장에서 전력변환기와 운영시스템은 DC배전의 핵심이며, 향후 기술방향도 전력변환기의 국산화와 운영시스템 개발 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만큼 이 부분에서 선도적인 기술력을 확보한다면 유리할 수 있다는 게 그의 판단이다.

“LS산전의 경우도 5년 전에는 DC배전사업 참여를 신중하게 검토하다가 그 이후에 자신들이 갖고 있는 차단기 기술을 DC분야에 적용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현재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거든요. 다른 기업들도 이런 전략으로 DC시장에 대응해야 한다고 봅니다.”

김 연구원은 특히 DC배전 시장 확대와 관련해 정부의 역할을 강조했다. 현재 한전 주도로 진행되는 DC배전 인프라 구축의 판을 더욱 키우기 위해선 이제 정부도 나설 차례라는 것이다.

국가 차원의 기준이나 규격, 기술개발 노력 없이 한전 자체적으로 DC배전망을 구축하는 것은 시간과 규모면에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게 그의 판단이다.

“DC배전에서 가장 중요한 게 전력변환기입니다. 전력변환기는 앞으로 장수명, 컴팩트한 부피, 신뢰성 등을 확보하는 게 과제입니다. 그런데 이런 장애물은 내부에 들어가는 전력용반도체 등 부품을 개선해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전력용반도체는 아직 미국, 일본산과 기술격차가 있어 수입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정부가 관심을 갖고 R&D지원을 확대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김 연구원은 DC배전망을 확대하고, 시장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전력변환기에 들어가는 전력용반도체 개발, DC기술기준 및 법·제도 마련 등 필요한 요소들을 동시다발적으로 추진해야 한다면서 이제는 시범사업이나 연구단계를 넘어 DC배전 분야가 꽃을 피울 수 있도록 정부가 판을 키울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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