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규/방송작가
이용규/방송작가

산비탈 양지에 살았다. 초가에 살았다. 가끔씩 구름이나 안부를 물어오는 호젓한 동네였다. 툇마루에서 잠들 때마다 아버지의 쟁기소리가 새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마음 아득한 집이었다. 오로지 방문객이라곤 지게에 엿판을 지고 능선을 넘나드는 엿장수뿐이었다.

어느 날이었다. 너무나 엿이 먹고 싶었던 나는 헛간을 뒤져 처마에 걸려있던 아버지의 쇠 보습을 건네고 말았다. 뒤란에 숨어 남김없이 엿을 먹었다.

그때였다. 아버지가 돌아오셨고 쇠 보습을 찾으셨다. 아버지는 금방 사태를 파악하셨다. 내 입술에 하얀 엿 분말이 묻어있었던 것이다. 나는 능선으로 내달렸다. 아버지의 호통소리가 그날처럼 크게 들린적은 처음이었다. 겨우 엿장수를 붙들었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엿장수는 눈물을 닦아주며 쇠 보습과 함께 엿 한 가락을 건네줬다. 집으로 돌아올 때 몇 번이나 아저씨를 되돌아봤다. 쇳덩이가 그리도 가벼울 수 있음을 그때 처음 알았다.

아무리 잘못해도 손찌검 한 번 하지 않으셨던 아버지, 무거운 엿판을 지고 능선을 넘나들던 그 착한 소아마비 엿장수 아저씨, 초가, 미루나무, 구름, 돌담장에 기대 살아가던 대나무, 그리고 마늘 밭 하나 밟지 않고 이어지던 오솔길.

이처럼 나의 봄날은 항상 꽃보다 아름다운 기억으로 포장돼 있다. 그 기억의 길은 지금도 좀처럼 잊혀지지 않고 괴로울 때마나 마법처럼 나타나 나를 위로하고 나의 존재를 각인시킨다. 아-내가 성장한 건 우연이 아니었구나. 수많은 풍경과 시간의 건사가 있었구나.

종종 나야말로 아름다운 환경 속에서 성장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얼마 전 시제를 모시러 고향에 갔을 때였다. 조상들께 제를 올리고 모인 집안 형제들과 대화를 나눌 때 나는 알았다. 각각의 기억이 얼마나 뚜렷하게 남아있고, 그 아름다운 기억을 붙들고 사는지를. 그 기억이 살아가는 힘이고 명분인지를.

고향의 형제들은 자연스럽게 자신들이 기억하고 있는 고향의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누구는 미꾸라지를 잡으러 4~5리 되는 논고랑 사이를 돌아다녔으며, 누구는 쑥망태를 들고 등교했으며, 또 더러는 하굣길 배고픔에 쓰러졌다는 이야기도 쏟아냈다. 이렇듯 기억은 가난과 고통마저 달콤함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일까.

그때서야 나는 왜 고향이 그처럼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게 됐는지를 알게 됐다. 잠시 후 형제들은 고향을 떠나 어떻게 살았는지를 쏟아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어린나이에 버스 차장에 취직해 동상에 걸렸으며, 또 누군가는 막노동판에 뛰어들어 추락하는 바람에 젊은 날 틀니를 해야 했고, 또 누군가는 인쇄소의 재단기에 손가락을 잃기도 했다는 것이다.

모질게도 가난했던 고향을 떠났건만 결코 행복한 삶을 갖지 못했던 사람들. 아름다운 기억보다 고달프고 외로웠던 기억만을 품게 만들었던 지난 시절들. 그런 시절들과 함께 세월을 견디며 그나마 고향의 기억 하나쯤 품고 살았던 것이다. 그러니 어찌 고향의 기억이 아름답지 않겠는가.

요즘 들어 진보와 보수 이야기가 많이 들린다. 왜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 보수가 되는 것일까. 이제야 그 까닭을 조금씩 알 것 같다. 사람이란 때로 자신의 인생을 돌아볼 때가 있다. 그때 아름다운 시절을 떠올리기 마련이고 그 시절이란 필연적으로 자신만이 가진 옛날의 한 지점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보수적이라 비난할 때 어르신들은 자신이 갖고 있는 소중한 기억을 빼앗긴다는 상실감에 시달리게 된다. 목숨보다 소중한 것을 어찌 빼앗기려 하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또 어찌 가난한 어르신들이 더욱 보수적일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니 보수를 탓하지 않기로 한다. 그 보수란 단어 속에 인생의 고달픔이 녹아있다는 것을 이해하기로 한다. 그것이야말로 눈물과 고통, 험난한 시대를 살아온 자신의 그림자가 녹아있다는 것을 알아주기로 한다. 보수를 탓하기 전에 위로해주기로 한다. 위로가 아닌 어떤 말로 그들의 삶을 치유할 수 있겠는가.

아침 안개가 유독 많은 시절이다. 땅속에 박혀있던 씨앗과 뿌리들이 안개의 냄새를 맡고 지상으로 올라온다는 시절이다. 가끔씩 꽃피는 식물들을 볼 때 어루만지고 싶어진다. 얼마나 아름다워지려고 이 나무는 매년 꽃을 내보내는지 대견하기만 하다.

같이 지상에 순을 내밀었지만 어떤 식물은 꽃밭에 옮겨지고, 또 어떤 식물은 전답의 주인이 되기도 한다. 어떤 식물은 농부의 호미 끝에 매달려 밭 가장자리로 내던져지기도 한다. 풀의 인생 역시 사람의 인생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봄 땅은 수많은 식물들이 써내려간 삶의 이력서와 같다.

오늘도 그 이력서 위로 바람이 분다. 꽃들이 흔들린다. 결코 사소하지 않은, 쓰다듬어주고 싶은 인생들. 그 인생들 위로 봄날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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