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을 쳤던 국제구리시세가 지난해 11월을 기점으로 오름세로 돌아선 뒤 지속적으로 상승하면서, 전기동을 주요 원자재로 사용하는 전선업계가 급격히 요동치고 있다.

구리는 전선 원가의 60% 이상을 차지하는 주요 원자재로, 동값 변동은 구조상 전선업체의 매출, 영업이익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이로 인해 최근 동 값 상승은 전선 가격 증가에 영향을 끼쳤고, 자연적으로 기업 매출이 늘어나면서 ‘겉보기에는’ 전선업계가 불황을 이겨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정을 자세히 살펴보면 치솟는 구릿값을 따라잡지 못하는 시장가격과 장기 프로젝트성 물량에 대한 인상분 미적용 등으로 오히려 이익이 하락하는 등 지나치게 빨리 오르는 구리 가격으로 인한 부작용에 시달리고 있다.

국제구리시세는 2015년 초 t당 6200달러대에서 2016년 초 4600달러대로 곤두박질쳤고, 연내 4310.5달러까지 떨어지며 바닥을 쳤다.

지난해 11월까지 하락세였던 구릿값은 갑자기 반등해 11월 1일 4862.5달러에서 단 10일만인 11월 11일 5900달러로 1000달러 이상 치솟았다. 이후 올해 7월까지 6000달러 선을 오르내리며 높은 가격에서 안정화되는 모습을 보이다, 7월말부터 8월 사이 급격히 오르며 작년 11월 이후 다시 한번 폭등 조짐을 보이고 있다.

8월 29일 현재 동값은 t당 6797달러로, 7000달러선을 위협할 지경에 이르렀다. 지난해 구릿값 상승 이후 10개월만에 42.5% 가량 증가한 수치다.

구리가격 상승은 일반적으로 전선업계에 호재로 작용한다.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어느정도 예측 가능한 방향으로 움직일 경우다.

하지만 지난해 말부터 최근까지 이어지고 있는 구릿값 상승세는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진행돼 오히려 전선업계에 부정적 영향을 크게 끼치고 있다.

몇 달 사이의 가격을 예측, 시판가나 입찰 가격을 결정해야 하는데, 급격히 움직이는 시장에서는 불확실성이 커지며 그에 따른 리스크도 상승한다.

구리 원자재 구매와 전선 판매가 급격한 시장 변동으로 투자에서 투기로 변모하는 것이다.

특히 견적→계약→원자재 구매→제조→출하→시공 단계를 거쳐야 하는 전선 제조 공정은 짧게는 몇주에서 길게는 1년에 이르기 때문에 업체들이 시장 변화를 따라잡지 못할 경우 어쩔수 없이 리스크를 떠안아야 한다.

장기 프로젝트 수주 업체들, 납품 포기 하거나 파산 사례도 발생

실제로 지난 10개월간의 구릿값 고공행진으로 장기 프로젝트 물량을 수주한 업체들이 납품을 포기하거나 파산에 이른 사례가 다수 발생했다.

일례로 서울 강서구 마곡지구 한 건설현장에 대량의 전선을 공급하기로 한 유통업체 A사는 계약금액을 초과하는 전선 구매 가격에 버티지 못해 쓰러졌다.

메이저 전선브랜드의 주요 대리점 중 하나였던 K업체도 파산했으며, 모 업체는 대표가 경영난을 비관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까지 일어났다.

때문에 최근 모 공공기관이 진행한 전선구매입찰에서는 10여개에 이르는 투찰업체들이 구릿값이 보다 오를 것으로 보고 이를 적용한 가격을 써내 모두 예가를 초과, 유찰되는 진풍경도 벌어졌다.

전선업계 관계자는 “프로젝트성 물량의 경우 입찰을 거친 뒤 반년에서 1년 뒤에야 납품하게 된다”며 “작년 11월 구릿값 급등 이전까지만 해도 구리가격은 약세를 보였고,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낮아질 거라는 전망에 따라 입찰 당시 시세보다 낮은 가격에 계약을 체결한 사례가 비일비재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런데 반대로 동값이 계속 오르면서, 도저히 계약금액에 맞춰 제품을 납품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게 됐다. 결국 손을 들거나, 부도까지 이르는 것”이라며 “물가 변동에 따라 납품단가를 인상하는 것은 법으로 규정된 관수 조달물량에나 해당하지, 민수시장에서는 적용할 수 있는 한계가 분명하다. 더욱이 경쟁이 치열한 시장 상황에 덤핑수주와 불공정계약이 판을 치는 상황이라 더더욱 어렵다”고 덧붙였다.

유통업체뿐 아니라 제조사들도 어려움은 마찬가지다.

실제로 상장 전선업체들은 상반기 매출이 늘었지만, 반대로 수익성이 저하되는 모습을 보였다.

대한전선 제외 가온・일진・대원전선 영업익 감소

대한전선과 가온전선, 일진전기, 대원전선 등 4사 중 대한전선을 제외한 나머지 3개사는 전년대비 늘어난 매출에도 영업이익이 감소하는 모습을 보였다.

상장사는 아니지만 국내 1위 전선업체 LS전선은 매출은 8%가량 늘었지만, 영업익은 약 10% 감소했다. 글로벌 기업인 넥상스 코리아도 매출이 증가했지만, 영업익은 마이너스로 돌아섰다.

해당 업체들과 OEM 등 협력관계로 엮인 중소기업들도 매출은 증가했지만, 수익성은 감소하는 문제를 공통적으로 겪고 있다.

선물거래나 헤징 등 동 가격이 급변할 때 리스크를 줄여주는 여러 시스템이 분명 존재하지만, 수년째 전선산업에서 벌어지고 있는 치열한 가격 경쟁은 전선업체들이 급변하는 구리가격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는 시스템을 운용하는 데 한계가 되고 있다.

전선업계 관계자는 “동값이 낮아질 때는 발주자들이 전선 구매를 늦추려고 한다. 시간이 지나면 보다 낮은 가격에 구매할 수 있다는 기대가 있어서다. 반대로 오를 때는 전선 구매 시기를 앞당긴다. 늦어질수록 전선을 비싼 가격에 사야 한다는 리스크 때문”이라며 “구리시세가 완만하게 장기적으로 상승한다면 어려운 업계 상황에 큰 도움이 될 수 있겠지만, 지금처럼 빠르고 예측 불가능하게 움직이는 상황은 전선업계에 더 큰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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