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은 농축·재처리 권한 얻는 데 꼬박 20년…한미 샅바싸움 시작

1967년 ‘비핵 3원칙’ 선언한 일본 20여년 뒤 1988년 美日협정 개정 순수 ‘경제·상업적’ 목적 강조하되 원전확대 등 정책 정합성 맞춰야 미국 대상 핵비확산 의지 설득력

2025-11-18     정세영 기자
일본 아오모리현 롯카쇼무라에 있는 사용후핵연료 재처리시설 전경. [사진=일본원자력연료주식회사 웹사이트]

한국이 우라늄 농축과 사용후핵연료 재처리 권한을 확보하는 숙원을 이루기 위한 첫발을 뗐다. 한미 양국이 공개한 관세·안보 분야 공동 팩트시트에 ‘미국이 한국의 농축·재처리를 지지한다’는 문구가 명문화되면서다. 하지만 일본과 같은 포괄적 사전동의를 얻기 위해 한미 원자력협정 개정을 추진해야 하는 만큼 쉽지 않은 과제도 남아있다. 지난한 후속 협의가 예상되는 대목이다. 전문가는 농축·재처리의 평화적 활용을 위한 ‘마스터플랜’을 미국에 제안하는 것이 긴 샅바싸움의 핵심이라고 말한다.

◆비핵 3원칙 선언한 일본…美 신뢰 얻어내는 데 20년

“일본은 핵무기를 만들지도, 보유하지도, 들여오지도 않는다.” 사토 에이사쿠 전 일본 총리가 1967년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선언한 ‘비핵 3원칙’이다.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는 1982년부터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을 설득해 사용후핵연료 재처리시설과 고속증식로, 우라늄 농축시설 등을 건설할 수 있도록 미일 원자력협정을 개정하는 데 합의했다.

1988년 발효된 미일 원자력 개정 협정의 핵심은 우라늄 농축과 사용후핵연료 재처리와 관련해 일본이 미국으로부터 ‘포괄적 사전동의’를 얻어냈다는 점이다. 협정 개정 전 일본은 미국의 ‘개별 허가’ 형식을 통해 농축·재처리를 제한적으로 수행할 뿐이었다.

‘포괄적 사전동의’는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이 농축·재처리 권한 확대와 관련해 꾸준히 언급해 온 일본식 모델의 핵심이다. 일본은 원자력시설의 운영 범위와 절차를 미국과 사전에 정해 두고, 그 범위를 벗어나지 않으면 개별 허가를 받지 않고도 독자적으로 농축·재처리를 수행할 수 있다. 일본이 비(非) 핵보유국 가운데 유일하게 민수용 농축·재처리 공장을 운영하게 된 결정적 배경이다.

우라늄 농축과 사용후핵연료 재처리는 광산에서 우라늄을 캐 핵연료를 제조하고 폐기물을 처리하는 모든 과정을 뜻하는 ‘핵연료주기’에서 각각 선행주기와 후행주기의 한 부분을 차지한다. 우라늄은 천연 상태로는 발전용 연료로 쓸 수 없어 일정한 수준으로 농축해야 한다. 사용후핵연료는 재처리를 통해 재활용함으로써 원전 운영 효율을 높일 수 있다. 재처리는 고준위 방사성폐기물의 부피를 줄이는 기술이기도 하다. 이처럼 농축·재처리 권한 확대는 에너지안보를 강화하는 유용한 수단이 된다.

한미 원자력협정 11조는 “한미 고위급위원회 협의에 따라 양측이 서면 약정을 맺으면 한국이 20% 미만의 우라늄 농축을 할 수 있다”고 규정돼 있다. 이는 미국의 ‘개별 허가’를 전제로 한다. 반면 한미 양국이 지난 14일 공개한 공동 팩트시트에는 “미국은 한미 원자력 협정에 부합하고, 미국의 법적 요건을 준수하는 범위 내에서 한국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민간 우라늄 농축 및 사용후핵연료 재처리로 귀결될 절차를 지지한다”고 적혀 있다.

팩트시트 문구를 뜯어보면 한국이 농축·재처리 권한을 확보하기 위한 세부적인 방법이 빠져 있어 한미 양국 간 후속 협의를 통해 관련 절차를 결정할 것으로 보인다.

미국과 후속 협의 과정에서 한국이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은 농축·재처리 권한 확대를 핵잠재력이나 핵무장론과 섣불리 연결 짓는 일이다. 고농축 우라늄이나 재처리 기술을 통해 사용후핵연료에서 추출한 플루토늄은 핵무기 개발에 대한 미국의 우려를 자극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위 실장이 한미 팩트시트 발표 후속 브리핑에서 “농축·재처리는 순전히 경제적·산업적인 목적에서 추진하는 것”이라며 핵주권 확대론과 강력하게 선을 그은 배경이다.

1967년 ‘비핵 3원칙’을 선언한 일본은 이후 완전한 비핵화 정체성에 대한 미국의 신뢰를 얻어내며 20여 년 만에 농축·재처리 권한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은 비핵 3원칙 외에도 핵확산금지조약(NPT) 완전 준수, 재처리·플루토늄 재고량 공개 및 투명화, 사용계획 기반 플루토늄 보유 등을 미국에 약속했다. 농축·재처리 자율권을 갖는 대신 미국의 핵물질 관리 체계하에 들어서겠다는 점을 천명하고 얻어낸 외교·정치적 특례인 셈이다.

◆평화적 농축·재처리 담은 ‘마스터플랜’ 수립…美 제안

전문가는 미 정부를 상대로 한국의 농축·재처리 권한 필요성을 설득하기 위해 먼저 국내 핵연료주기 정책의 정합성을 갖춰야 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가령 플루토늄 추출 기술인 사용후핵연료 재처리 권한을 확보한들 우라늄·플루토늄 혼합산화물(MOX) 연료를 태울 원전이 없다면 한국의 핵비확산 의지에 대해 미국의 의구심을 살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문주현 단국대 에너지공학과 교수는 “농축·재처리가 민수용이라는 점을 강조해도 핵연료주기 정책, 원전 확대 방침 등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군수용으로 의심받을 소지가 생길 수밖에 없다”며 “향후 원전 운영 계획과 농축우라늄 수요, 핵비확산 시설을 언제까지 갖추겠다는 내용의 마스터플랜을 수립해 미국에 제안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경수로 위주인 한국은 설계변경을 통해 MOX 연료를 태운다는 등 세부적인 계획까지 갖춰야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