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기획) 韓도 본격 시동 거는 V2G, '전기차, 움직이는 발전소 된다'
정부, V2G 협의체 윤곽…R&D에서 시장으로 전환 제주·의왕 분산특구, 실증 무대서 제도 개선 연계 유럽은 ‘무료 주행’' 혜택으로 상용화 가속 전기차에서 에너지 민주화로…새 전력 질서의 출발
정부가 전기차를 ‘움직이는 에너지 저장장치’로 활용하는 V2G(Vehicle to Grid) 상용화를 위한 민관 협의체를 이달 중 출범한다. 정부·지자체·전력기관·자동차업계·ICT 기업이 참여해 요금체계와 정산제도, 전력망 통합 등 시장 진입 장벽을 허문다는 계획이다. 이는 그동안 R&D 영역에 머물렀던 V2G가 상용화 궤도에 오르는 신호탄으로 해석된다. 같은 시기 제주와 의왕 등이 분산에너지특구로 지정되면서 V2G 실증 인프라도 확충되고 있다.
◆V2G 협의체 출범…한전·현대차 재협력 주목
기후에너지환경부가 주도하는 'V2G 추진 협의체'의 윤곽이 잡히고 있다. 이번 협의체의 가장 큰 의의는 그동안 파편적으로 진행됐던 V2G 실증 사업들을 하나의 테이블로 모았다는 점이다. 동시에 단순 실증을 넘어 실제 전력망 연계 방안과 요금체계, 법제도 개선까지 함께 논의한다는 점에서 V2G의 실질적 시장 진입을 위한 첫걸음으로 평가받는다.
V2G 실증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현대차는 제주에서 건물과 연계한 실증을, 한전은 수입 전기차와 별도 프로젝트를 진행해 왔고, 이외에도 여러 기관에서 연구가 진행됐다. 다만 과거 두 회사가 함께 V2G를 추진하다 의견 차이로 각자의 길을 걸었던 점을 고려하면, 이번 협의체에서 다시 힘을 합칠 것으로 보인다는 점도 의미가 크다.
협의체는 11월 중 출범하며, 정부·지자체·전력기관·자동차·중전기 업계·ICT 기업·학계가 참여하는 민관 통합 구조다. 당초 4개 분과로 구성하려 했으나, 효율성을 위해 ▲정책·제도+전력·시장 ▲전기차+충전기·통신 등 2개 분과로 재편하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 배터리 분과도 빠졌다.
협의체는 이미 마련된 스마트제어 충전기 보급, 배터리 정보 제공 의무화, ISO 15118-20 통신표준 등을 활용해 요금체계·정산제도·전력망 통합 등 실질적 현안을 다룬다.
김성환 장관이 3년 전 V2G 관련 법안을 발의한 경험도 추진력을 기대케 하는 요인이다. 특히 에너지 부처가 환경부로 통합되면서 부처 간 협의를 최소화하고 환경부 내에서 사업을 추진할 수 있게 된 점도 기대감을 높이고 있다. 정부는 2026~2027년 1만대 차량·충전기가 참여하는 시범사업을 거쳐 2028년 성과를 제도에 반영할 계획이다.
◆NDC 달성 압박 속…V2G는 선택 아닌 필수
V2G가 정책 전면에 나선 배경에는 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NDC) 달성 압박이 자리한다. 2030년까지 온실가스를 2018년 대비 50~60% 감축해야 하는 상황에서 재생에너지 비중을 높여야 하지만, 태양광과 풍력의 간헐성은 전력망 안정성을 위협한다. 이 간극을 메울 수 있는 것이 전기차 배터리다.
전기차 보급 급증으로 배터리 총량도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 이를 충전 대상이 아닌 전력망과 연결된 '분산형 에너지 자원'으로 활용하면 피크 시간대 수요 완화와 재생에너지 변동성 흡수가 가능하다. 에너지 시스템이 중앙집중형에서 분산형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V2G는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고 있다.
중앙집중형 전력망은 재생에너지의 간헐성과 급격한 수요 변동에 대응하기 어렵다. 수요지 인근에서 생산과 소비를 동시에 해결하는 ‘지산지소형’ 모델의 대안으로 V2G가 핵심 기술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런 배경에서 V2G는 필수가 되고 있으며, 해외에서는 이미 상용화 단계에 진입했다.
◆유럽 V2G 상용화 가속…‘무료 주행’으로 소비자 끌어들여
유럽에서는 2024년 말부터 주요 전력회사와 자동차 제조사가 손잡고 상업용 V2G 요금제를 속속 출시하고 있다. 독일의 E.ON과 BMW는 충전기 연결 시간당 0.24유로를 보상해 연간 약 1만4000km 무료 주행 혜택을 제공한다. 프랑스의 Mobilize는 시간당 0.06유로 보상으로 연간 1만880km, 영국의 Octopus는 월 240시간 이상 연결 조건을 충족하면 연간 1만2000km 무료 주행이 가능하다.
작동 방식은 단순하다. 사용자는 출차 시간과 목표 충전량만 설정하면, 실제 충방전은 공급자가 전력 가격과 계통 상황에 맞춰 제어한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차를 오래 꽂아둘수록 혜택이 커지는’ 구조라 받아들이기 쉽다.
유럽 사례가 한국에 던지는 가장 큰 시사점은 인프라 격차에 따른 확산 속도 차이다. 프랑스는 스마트미터 보급률이 94%에 달해 V2G 확산에 유리한 반면, 독일은 2%에 불과해 제약이 크다. 영국은 62% 보급률을 바탕으로 빠르게 시장을 키우고 있다.
전력시장 가격 변동성도 중요한 변수다. 2024년 기준 독일은 전체 거래 시간의 8.5%가 kWh당 0.5센트 이하였고, 4.1%는 15센트를 넘어 변동 폭이 컸다. 프랑스는 11.5%가 0.5센트 이하로 상대적으로 안정적이었다. 가격 변동성이 클수록 V2G로 얻을 수 있는 수익도 커진다.
저장 에너지 이중과세 문제, 경직된 소매요금제, 수천 개 배전망 운영자(DSO) 간 표준 부재는 유럽도 해결 중인 과제다. 한국은 이를 참고해 제도 설계 단계부터 선제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분산특구 지정…V2G 실증 인프라 확충
V2G 협의체 출범과 같은 시기에 분산에너지특구 지정도 이뤄졌다. 지난 5일 제주, 전남, 부산 강서구, 경기 의왕시가 최종 선정됐다. 이 가운데 제주와 의왕은 V2G 실증을 핵심 사업으로 내세웠다.
제주는 분산특구 핵심 사업으로 전기차를 전력망과 연결하는 V2G 실증을 앞세우고, 태양광·ESS와 결합해 가상발전소(VPP) 단위로 하루전·실시간 시장에 참여하는 모델을 병행한다. 의왕은 공원 내 태양광·ESS·전기차 충전소를 연결하는 마이크로그리드에서 V2G 실증을 진행한다.
분산특구로 지정되면 전기사업법상 ‘발전·판매 겸업 금지’ 예외가 인정돼 전력직접거래가 가능해진다. 한전과 다른 요금제를 적용할 수 있어 데이터센터 같은 대규모 전력 수요처 유치에도 유리하다.
협의체가 제도와 시장 진입 논의를 이끈다면, 분산특구는 실증 데이터를 쌓는 테스트베드 역할을 한다. 두 정책이 별개 트랙으로 진행되지만 V2G 생태계 조성이라는 큰 그림에서는 상호 보완적이다.
◆V2G, 에너지 민주화 핵심 기술…제도 정비 필수
전문가들은 V2G를 단순히 충전 기술 진화가 아니라 에너지 시스템 전환의 핵심 축으로 본다.
전력 관계자는 “전기차 보급이 늘수록 배터리 총량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이를 전력망과 연결하면 국가 차원의 ‘분산형 에너지 자산’이 된다”며 “전력 피크 시간대 수요 완화와 재생에너지 변동성 흡수에 결정적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전 경영연구원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이 V2G를 성공적으로 안착시키려면 ▲고도화된 스마트미터 보급 확대 ▲요금제 유연화 ▲그리드 코드 표준화 ▲이중과세 해소 등이 필요하다고 제시했다. 한 전력업계 관계자는 "기술적 가능성만으로는 시장을 열 수 없다"며 "소비자에게는 유럽처럼 '무료 주행' 같은 직관적 혜택을 제공해 참여를 유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글로벌 시장 전망도 밝다. 시장조사기관 Mordor Intelligence는 V2G 시장 규모가 2025년 57억5000만달러(약 8조3196억원)에서 2030년 195억달러(약 28조2145억원)로 성장할 것으로 내다봤다. 연평균 성장률 27.6%에 달하는 고성장 시장이다.
한 전기차업계 관계자는 “협의체를 통해 제도적 장벽을 빠르게 허물고 실증 성과를 쌓아간다면 글로벌 V2G 시장에서 선도적 위치를 차지할 기회를 잡을 수 있다”고 전망했다.
다만 업계 일각에서는 우선순위에 대한 고민도 제기된다. 한 업계 관계자는 “전기차 보급 확대라는 당면 과제가 산적한 상황에서 V2G까지 동시에 추진하는 게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라며 “협의체 참여는 하지만, 업계 애로사항 해소와 병행되길 바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