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눈)안전한 전력망 설계, 시작은 기술 연구에서부터
최근 국내 유일하다시피 한 가공송전 연구 조직을 취재하며 전력망과 송전산업이 기술 단절과 인력 기반 약화라는 이중 위기에 직면해 있음을 재차 실감했다. 초고압 송전 기술을 책임지는 한전 전력연구원 송전솔루션팀은 수십 년간 쌓아온 실증 기반의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지만 정규 인력은 채 10명도 되지 않는다. 앞으로 다가올 수백km 단위의 초고압 송전망 사업을 시공하고 유지할 전문 기술인력 역시 전국에 수백 명 수준에 불과하다. 늘어나는 전력수요와 재생에너지 연계 수요를 직면하고 있는 현재, 이처럼 한정된 조직과 인력에 국가 전력망의 미래가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결코 가볍지 않다.
근래엔 지중송전이나 해저케이블, 비전통적 계통대안(NWAs) 기술 등이 새로운 해법으로 주목받고 있다. 지중화는 주민 민원을 줄이고 도시공간 활용도를 높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지중 송전은 가공에 비해 수 배에 달하는 설치 비용이 들고, 해저 케이블은 짧은 수명과 어려운 고장 복구가 난점으로 꼽힌다. 현실적으로 장거리·대용량 송전에 가공송전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실정이다.
최근 취재한 독일도 1000km를 훌쩍 넘는 HVDC 선로를 계획 및 공급하면서 같은 문제에 봉착했다. 시민사회와 10여년간 소통한 끝에 대부분의 노선을 지중화하는 데 동의했지만, 추후 시민들이 받아들 청구서는 무거울 전망이다.
그럼에도 국내에선 여전히 상황 인식이 엇갈린다. '전력망은 충분하다'거나 '추가적인 기술 개발은 불필요하다'는 주장이 난무한다. 강렬한 주장이지만, 향후 전력수요나 재생에너지 폭증에 대응할 수 있는 HVDC급 초고압망의 부족한 현실에는 눈을 감는다. 최소한 한 국가에 설계·실증·기준 능력과 인력, 조직이 있고 없고는 하늘과 땅의 차이다. 이들이 떠받치는 기반 기술 없이는 지중이든 가공이든 선택지 자체가 사라진다.
지금 필요한 인식전환은 분명하다. 필요한 기술을, 필요할 때 쓸 수 있도록 연구가 끊기지 않아야 한다는 것. 이들 인력과 지식이 축적되고 재생산될 수 있도록 관심을 갖고 뒷받침하는 일이야말로 전력망의 미래를 지키는 ‘계통 설계’의 시작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