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EF 2025] EU 슈퍼그리드·아세안전력그리드(APG), 실마리는 ‘정부 간 협력’부터

전력망 연계 효과 분석 본격화...‘말레이시아 모델’ 공개 EU는 비용편익 기반 비용분담 “규제 신뢰가 핵심” 경제통합 수단으로 부상했지만, 정치·법·기술 과제 여전

2025-06-09     필리핀 마닐라=김진후 기자
올거츠 빅스네(Olgerts Vigsne) 유럽연합 집행위원회(European Commission) 관리자가 EU 내 국가 간 연계망 건설 사례를 소개하고 있다. [제공=한국에너지공단]

동남아시아 지역 재생에너지 확대의 기반인 지역 간 전력망 연계 논의가 한층 고도화되고 있다. 아세안 파워그리드(APG) 프로젝트의 실현을 위해 전력계통 표준 정합, 대규모 투자비 분담, 정치적 합의 형성 등 실질적 장애요인과 해법도 화두로 떠올랐다. 동북아 슈퍼그리드 등 연계망 논의에 동참해 온 우리나라로서도 향후 정책 방향 결정에 시사점을 주는 대목이다.

지난 4일 필리핀 마닐라 아시아개발은행(ADB) 본부에서 열린 ‘아시아청정에너지포럼(ACEF) 2025’에서는 아세안(ASEAN) 지역의 역점 사업인 APG 프로젝트에 대해 집중 논의했다. 세션은 프로젝트의 실현 가능성을 높일 전략과 제도 및 환경적 장애물, 경제효과 등에 대해 전문가들의 의견을 모았다.

전날 열린 개막식 패널 토론에서도 탄 수언 IEA 싱가포르 지역협력센터장은 “재생에너지 공급 편차를 해소하고, 송전망을 공유함으로써 개별국의 인프라 부담도 줄일 수 있다”며 “중남미처럼 연계망만으로 연 1억달러 이상의 절감효과를 낸 사례를 아시아도 참고해야 한다”고 말했다.

APG는 동남아시아 국가연합(ASEAN) 회원국 간 전력망을 상호 연결해 전력의 안정적 공급과 재생에너지 공동 활용을 도모하는 역내 인프라 통합 프로젝트다. 1997년부터 논의가 시작돼 현재까지 7개 주요 연계망을 구축했다. 

장기적으로는 국가 간 전력 무역 확대와 에너지 안보, 전력요금 안정, 재생에너지 효율적 배분을 목표로 한다. APG 구축 완료 시에는 향후 역내 공동 시장 형성과 투자 유치에도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EU는 어떻게 전력시장을 통합했나

이날 포럼에서는 앞서 지역 연계망을 개발해 운영 중인 유럽연합(EU)의 사례와 함께 APG 프로젝트가 연계된 말레이시아의 연계망 효과에 대한 초기 연구가 공개됐다.

올거츠 빅스네(Olgerts Vigsne) 유럽연합 집행위원회(European Commission) 관리자는 “EU는 1990년대 고립된 국가별 송전망 구조에서 벗어나, 법·제도·시장개혁을 통해 현재 약 430개의 국가 간 연계망(interconnectors)을 구축한 상태”라고 말했다.

1996년 첫 전력시장 자유화 입법 이후 2003년·2009년의 패키지 법안, 에너지 규제기관(ACER)과 전력망 운영자 네트워크(ENTSO-E) 설립 등이 전력시장 개방의 핵심이었다는 설명이다.

빅스네 관리자는 “단순히 제도를 만들었다고 시장이 바로 작동한 건 아니다. 양국 간 거래로 시작해 서서히 확대된 것이 EU 시장”이라며 “초기에는 서유럽, 북유럽, 이후 남유럽이 합류하며 현재의 단일시장으로 발전했다”고 밝혔다.

특히 비용은 단순 거리나 설비 비율이 아니라 편익을 반영한 ‘Cross-Border Cost Allocation(CBCA)’ 방식으로 분담해 연계 사업을 실현해 왔다고 강조했다.

망 연계가 ▲경제효율성 ▲공급안정성 ▲지속가능성의 세 측면에서도 유의미한 성과를 이끌었다고도 밝혔다.

그는 “연간 90억유로의 발전비용 절감을 비롯해 560만개의 일자리 창출, 1000억유로의 GDP 효과가 발생했고, 전기요금 변동성도 낮아졌다”며 “이 모든 것은 규제 일관성과 정치적 신뢰가 뒷받침된 결과”라고 강조했다.

◆ 말레이시아 “전력 무역 확대, 막대한 경제효과로 돌아올 것”

산치타 바수 다스 아시아개발은행(ADB) 지역 협력 및 통합 경제연구원은 이날 말레이시아의 APG 참여가 가져올 경제적 파급효과를 국제무역 모형(GTAP) 기반으로 추산한 결과를 소개했다.

다스 연구원은 “총 5가지 시나리오 중, 자국 내 재생에너지 확충만으로는 미미한 효과에 그쳤지만, 전력무역과 탄소세를 포함한 시나리오에서는 매크로 경제와 산업 전반에서 뚜렷한 성장 효과가 나타났다”고 밝혔다.

시뮬레이션 결과에 따르면 전력망 통합이 클수록 제조업과 서비스업의 생산성이 향상되고, 전기요금 하락과 산업경쟁력 강화로 이어졌다. 특히, 재생에너지 산업이 급성장하면서 부가가치와 고용 확대가 나타났고, 저소득층과 비숙련 노동자 계층의 소득 상승효과도 확인됐다.

그는 “말레이시아는 현재도 태국, 싱가포르 등과 전력 교역을 하고 있지만, 대부분 화석연료 기반이며 재생에너지 무역은 초기 단계”라며 “이런 국가 간 교역 구조를 전환하기 위한 제도적 보완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산치타 바수 다스 아시아개발은행(ADB) 지역 협력 및 통합 경제연구원이 말레이시아를 관통하는 아세안 파워그리드(APG)의 경제 효과와 과제 연구 결과를 공개하고 있다. [제공=한국에너지공단]

◆목표 높지만 기술·법·정치는 ‘장벽’...결론은 ‘정책 의지’

다만 APG 현실화를 위해 풀어야 할 숙제로 말레이시아의 구조적 한계와 아세안 지역 전체의 제도적 난관도 함께 언급됐다. 말레이시아는 송전망 평균 수명이 60년 이상으로 노후화했고, 보르네오섬 수력자원이 말라야 반도와 직접 연결되지 않아 내부 전력망 연결부터 선결 과제로 지목됐다. 전력 교역을 위한 국가 간 연결 링크도 라오스는 20개인 반면 말레이시아는 단 2개뿐이다.

또한 해저케이블 연계와 관련해선 ▲선박법 ▲배타적 경제수역법 ▲환경영향평가법 등 복수의 법률이 중첩되고 있다. 송전뿐 아니라 해저 점유, 해안선 사용, 규격 표준 불일치 등 기술·법률적 난제 또한 산적한 상황이다.

다스 연구원은 “LTMS-PIP(라오스-태국-말레이시아-싱가포르 간 파일럿 사업)가 선례가 되겠지만 아세안 전체가 통합되는 데는 정치적 신뢰와 공동의 비전이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APG는 아세안 경제공동체(AEC)의 일환으로, 외국인 투자 유치와 글로벌 공급망 참여에도 직결되는 전략 자산”이라며 ”전력망 통합은 경제통합의 시작점이며, 정치적 의지 없이는 실현 불가능한 과제”라고 말했다.

이어진 토론에선 정치적 의지를 확보하기 위해 지역 주민과 수혜국 모두에게 실질적인 경제적 이익이 돌아가야 한다는 점이 핵심적으로 논의됐다.

조지 스키퍼 루세티아 그룹 CEO(그린 그리드 이니셔티브 수석전략자문관)는 “정치적 의지 부족은 결국 경제적 이익 분배 설계의 실패를 의미한다”며 “원주민 공동체나 통과국에 지역경제 기여 방안을 사전에 제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해저조사와 같은 초기 조사비용을 공동으로 분담하고, 정보를 공유하는 시스템 차원의 접근도 비용과 리스크를 줄이는 열쇠로 언급됐다.

국가 간 전력계통의 제도적 조화와 고위급 협의의 필요성도 반복해서 제기됐다.

데니스 움라스 필리핀 에너지부 선임과학연구원은 “송전국과 수전국 모두에게 이익이 분명해야 하고, 각국의 그리드코드를 정렬할 협력체계가 필수”라며 “필리핀은 ‘ASEAN 2026’의 의장국으로서 이 논의를 주도하겠다”고 밝혔다.

이현정 ADB 수석 에너지 경제연구원(오른쪽 첫 번째)이 APG 심층 세션 패널 토론회를 주재하고 있다. [제공=한국에너지공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