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화마(火魔)가 할퀸 경북…전기를 지켜낸 사람들

최악의 산불과 사투 벌이며 전력설비 사수…대형정전 막았다 경북 의성서 시작된 산불, 영덕 등 5개 시군에 번지며 전력망 위협 한전 경북본부, 변전소 등 전력설비 총력 사수로 광범위 정전 막아 24시간 교대 복구 태세…잠재 위험요소 등 수개월 간 후속 점검 예고

2025-04-09     경북 안동, 영덕= 경북 산불 특별취재팀
경북 지역 대규모 산불로 안동시 한 마을과 변전소 인근 부지가 전소됐다. [사진=특별취재팀]

지난 3월 21일 경북 의성군에서 발화한 산불은 34번 국도를 따라 안동, 청송, 영양, 영덕 등 경북 지역 다섯 개 시·군으로 퍼져 나갔다. 국가유산청은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25일 재난 경보를 ‘심각’ 단계로 상향했다. 이는 유산 재난 경보 4단계 중 가장 높은 수위로, 사상 처음 발령된 것이다.

산불은 임야와 민가, 공장, 공공시설을 가리지 않았고, 주민 27만명이 거주하는 경북 지역 대부분을 집어삼켰다.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에 따르면 지난달 30일까지 4만5157헥타르(㏊), 축구장 12만5000개에 달하는 산지·농지가 전소됐다. 지역 내 사망자만 27명, 중경상을 합쳐 66명의 인명피해를 낳았고, 3200명의 주민이 대피하는 소동도 벌어졌다.

전력설비 측면에서의 피해도 우려됐다. 경북지역은 원자력과 석탄화력, 풍력, 수력 등 다양한 국가 전원이 밀집한 거점이자, 154~345kV 고압 송전망이 중첩되는 전략지대다. 울진 원전에서 생산한 전기는 삼척 GT와 현종산 풍력 등을 거쳐 서울까지 향하는데, 이 과정에서 영덕, 안동, 진보, 동안동 같은 중간 거점이 핵심 분기점으로 작동한다.

산불이 단 한 곳의 변전소라도 삼켰다면, 단순한 지역 정전이 아니라 전국 단위 전력망의 불안정이 초래될 수 있는 구조다. 이 때문에 이번 화재 대응은 단순 복구가 아니라, 전국 전력 체계의 사수 작전이었다.

본지는 지난 1일과 2일 안동부터 영덕을 잇는 당진영덕고속도로와 34번 국도를 따라가며 화마의 참상을 직접 목격할 수 있었다. 눈에 보이는 산등성이 대부분이 까맣게 그을려 앙상하게 가지만 남았고, 곳곳에는 담장이 타버린 민가들과 폐허가 된 마을이 눈에 띄었다.

현장을 안내한 한국전력 경북본부 전력관리처와 전국전력노동조합 경북전력지부 관계자는 “전력업계에 발을 담고, 경북지역에서 거주한 40년 이래 최악이자 최초의 재난”이라며 “2022년 울진-삼척 산불도 겪어 봤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바람을 타고 날아다니는 산불은 공포스러웠다. 주민 피해나 여러 측면에서도 이번 산불이 더 심각했다”고 설명했다.

당시 한전 경북본부는 실시간으로 변전소별 화재 접근 상황을 모니터링하며 우선순위에 따라 대응강도를 높여갔다. 첫째는 변전소 내부 설비의 직접 손상을 막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송전선로 자동차단으로 인한 블랙아웃(정전) 방지, 마지막은 주민 수용가까지의 전력 회복이었다. 복구 인력은 매일 교대조를 편성해 기초 정비를 지원했고, 인근 사업소에서는 차량·장비까지 즉각적으로 지원했다.

◆마을마다 전소 현장 수두룩…신속 복구·안전 확보 총력

경북 안동시 산불피해 현장에서 한국전력 직원들이 버켓트럭에 탑승해 배전설비를 점검 및 복구하고 있다. [사진=특별취재팀] 

안동시 일직면 국곡리. 의성과 맞닿은 이 마을의 농기구 창고 한 곳에 옮겨붙은 불길은 인근 농사용 배전선로와 계량기를 전소한 후에야 꺼졌다. 2일 취재팀이 찾은 현장에선 한전 직원 5명이 긴급 투입돼 복구 작업에 한창이었다. 절연장갑을 낀 손에 움켜쥔 절연체는 아직도 그을음으로 물들어 있었다. 현장 곳곳에는 탄 냄새가 남아있었고, 발밑엔 검게 타버린 계량기 조각이 흩어져 있었다.

현장에 파견된 한전 관계자는 “이 작업은 손상된 전선 등 시설을 걷어내는 과정이다. 설비복구를 위한 사전 정리절차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면서 “단순히 불이 난 곳뿐 아니라, 화재로 인해 잠재적인 설비 피해가 예상되는 지점까지 모두 안전조치를 시행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불이 난 시점뿐 아니라, 화재 이후의 조치도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설명이다. 버켓트럭에 올라선 직원은 전주에 붙어 전선 상태를 확인하고, 전류 차단 및 접지 안전 점검을 병행했다.

관계자는 “철제 기둥으로 지어진 농막에 전기가 누설될 위험이 있어 즉시 전력 차단 조치를 하는 중”이라며 “인근 주민의 접근을 통제한 후 후속해서 다른 팀이 전선 교체와 계량기 재설치를 순차적으로 진행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전국적 화재 대응체계와 별개로, 지역 단위의 선제적 전력 차단과 복구 작업이 병행되고 있다”며 “1일 하루에만 50여곳의 현장을 조치했고, 매일 수백 건의 위험요소를 점검하고 있다”고 밝혔다.

◆전력공급 거점, 동안동변전소…이격거리 등 한전 설계기준 ‘주효’

동안동변전소 부지 주변으로 까맣게 불에 타 있다.  [사진=특별취재팀]

전국 송전망은 거미줄처럼 연결돼 있다. 한 지점이 정지되면 그 영향은 순식간에 전국으로 확산할 수 있다. 특히, 경북은 전국 전력공급의 허리로서, 화재로 인한 손상은 치명적일 수 있다.

안동에 위치한 동안동변전소는 안동 시내의 절반, 청송 진보면, 영덕의 상당 지역까지 전기를 공급하는 전력의 요충지다. 이곳에는 154kV급 선로 3개가 교차하고, 가공선이 지중선으로 전환되는 케이블타워가 있다. 설비 하나하나가 전국 전력망의 균형을 지탱하는 핵심 축이다.

이곳에 화재가 도달할 경우 경북 권역을 넘어 충청·수도권까지 여파가 미칠 수 있는 긴급 상황이었다. 실제로 변전소 외곽은 검게 그을려 있었고, 임도엔 타고 남아 엉겨붙은 타르가 낭자했다. 진화가 이뤄진 지 일주일이 지났음에도 전소된 주변 임야와 농막으로부터 탄 냄새가 진동했다.

동안동변전소 케이블타워 방향으로 번진 불길의 흔적.   [사진=특별취재팀]

한전 관계자는 “안동으로 공급하는 전력의 3분의 2를 책임지는 동안동변전소가 무너졌다면 안동 시내 대부분이 암흑에 빠졌을 것”이라며 “불길이 변전소에 가까워지자 경북도청 소방서에 소방차를 요청했고, 직원들도 직접 물을 끌어와 진화에 나섰다”고 설명했다.

당시 119 신고 시스템은 마비돼 있었고, 소방차는 대부분 다른 지역에 배치돼 있었기 때문에 자력 대응이 불가피했다. 물 부족과 장비 파손에도 불구하고, 주요 설비를 지켜낸 이 조치는 안동 내 전력공급이 단절되지 않는 결정적 요인이 됐다.

큰불이 일어날 수 없도록 진행된 선제 조치도 설비로 불이 옮겨붙는 불상사를 막았다. 긴급상황에 처했던 동안동변전소와 영덕변전소 모두 산불 확산 차단을 위해 이격거리를 확보하는 한전의 설계기준이 이번 대응에 주효했다는 설명이다. 설비 주변 침엽수나 송진이 발생하는 나무들을 제거하는 등의 조치도 이미 이뤄진 상태였다. 해당 설계기준은 이미 국내 변전소 전반에 적용돼, 대규모 재난을 막을 ‘완충장치’로 작용할 전망이다.

◆불길과 싸워 영덕변전소 지켜내…일상회복 잰걸음

한국전력공사 경북본부 전력관리처 직원들이 화재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특별취재팀]

영덕변전소 곳곳에서도 치열한 진화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당시 화재진압에 투입된 윤한준 한전 경북본부 전력관리처 변전운영부 대리는 “25일 자정경에는 진입로까지 불길에 휘감겨 소방차도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며 “긴급조치에 따라 전원이 피신했다가, 한 시간 가량 지난 뒤 불길이 약해진 틈을 타 소방차 두 대를 이끌고 변전소 내부로 진입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 변전소는 울진 원전, 삼척 GT, 평해 풍력 등이 거치는 주요 전력 허브다. 실제 영덕지방 산간을 태운 불길은 송전선로 트립을 발생시키며 25일 저녁에는 정전을 야기하기도 했다. 당시 영덕 전체의 95%가 정전에 돌입했고, 나머지 5%는 포항 일부 선로로 간신히 전기를 공급받을 수 있었다.

김도국 영덕지사장이 화재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특별취재팀]

김도국 한전 영덕지사장은 “당시 영덕지사는 새벽까지 포항 개폐기에서 전기를 끌어와 변전소를 복구하는 작업을 병행했다. 내부 손상된 구간을 자르고, 살아있는 구간을 가동시키는 작업을 반복하며 차단된 전력을 복구해냈다”고 밝혔다.

자동화 설비가 모두 정지돼 인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고장 난 구간마다 조작자가 이동해 수동으로 차단과 연결을 반복해야 했다. 결과적으로 수시간 만에 영덕변전소는 되살아났고, 주요 간선은 그날 오전까지 모두 복구하는 데 성공했다.

한전은 철탑으로 불이 옮겨붙을 수 있는 나무들을 사전에 제거해 설비 화재를 미연에 방지했다. [사진=특별취재팀]

◆영덕지사, 주민 피해 최소화 및 정전 대응에 전 직원 투입

영덕지사는 현재도 전 직원을 비상 대응에 전면 투입한 상태다. 대구본부와 포항, 경주 등 인근 사업소에서는 2인1조 차량과 인력이 매일 교대 투입되고 있으며, 고객센터 민원 폭주에 대응하기 위해 대구본부 소속 민원 담당자도 추가 파견됐다.

김도국 지사장은 “안동이나 의성 등이 임야를 중심으로 불길이 확산된 반면 영덕은 불길이 주택, 마을 등을 덮쳐 인명피해가 컸다. 정전은 대부분 해소됐지만, 설비 내부의 열 손상과 잠재적 고장은 앞으로 몇 달에 걸쳐 드러날 수 있다”며 “주민들도 전기 접촉에 주의하고, 복구 신청과 점검 후 전력 연결을 요청해주길 바란다”고 전했다.

고압선 복구는 대부분 완료됐지만, 저압 유압선은 신고를 받아가며 순차 복구 중이란 설명이다. 지역 전기공사협회 회원사 및 관내 업체들이 전면 투입돼 설비 복구에 나서고 있다.

인구 다수를 노령인구가 점하고 있기에 피해 상황을 직접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이날 역시 한전은 5개조의 점검팀을 파견해 가가호호 설비 상태를 확인 중이었다. 이재민 임시주택 등 구호시설에는 긴급상황임을 감안해 선 전력공급 조치를 내리기도 했다.

◆불은 껐지만, 복구는 이제 시작…전력망 완전 회복까지 수개월

한전은 1차 긴급 복구와 설비 보전을 마친 상황이지만, 전력망 정상화까지는 갈 길이 멀다. 눈에 띄는 화재 흔적 외에도 열 스트레스로 인한 내부 손상, 그을음으로 인한 절연 저하, 탄화된 전선 피복 등은 향후 수개월에 걸쳐 차례로 나타날 가능성이 있다.

한전 경북본부 전력관리처 관계자는 “표면적인 복구는 마무리 단계지만, 그보다 더 긴 싸움은 보이지 않는 설비 손상과의 싸움”이라며 “한전은 전국적인 정비 시스템을 동원해 점검과 교체를 이어갈 계획이며, 전력의 일상화에는 수개월이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이번 대응을 바탕으로 대규모 재난피해를 방지할 대응모델을 수립한다는 계획이다.

경북본부 관계자는 “화재뿐 아니라 태풍 등 재난은 향후 상시 일어날 수 있다”며 “이번 경북지역 산불만큼 큰 재난이 처음이었기에, 이번 경험을 백서 형태로 제작해 매뉴얼화할 방침”이라고 설명했다.

경북 북부지역 산불 피해 범위. [사진=한국전력공사 경북본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