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격하는 ‘K-그리드포밍’, 전력분야 새로운 산업화 기반 첫발 디뎠다
한국생산기술연구원 컨소시엄, 국산 그리드포밍 설비 실증 성공 제주지역 안정성 강화 성능 입증...상용화・표준화 위한 기술 마련 병행 전압 제공 통해 계통 신뢰도・강건성 제고 기여 동기조상기 대비 30% 가격경쟁력 갖춰 수출산업 가능성 풍부
#제주 표선면 세화리에 위치한 한 태양광발전소. 이 발전소는 ‘그리드포밍’ 인버터 도입을 전후로 출력제어 건수가 연간 28회에서 2회로 급감했다. 최근 한국전력이 계통안정화 설비 도입 시 계통 우선접속을 보장하면서 얻은 혜택이다. 지난 3월 29일에는 급변하는 제주 계통 전압에 대응해 즉각 무효전력을 보상하며 계통 강건성에 기여하는 역량을 입증했다. 해당 발전소 소장은 “다양한 제도화로 계통 기여에 대한 보상이 후속됐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재생에너지 보급 확대로 급격히 불안정해진 전력망에 대응해 전압 제공을 통해 안정화에 기여할 길이 제시됐다. 순수 국산기술 100%로 구축한 한국형 그리드포밍 인버터 제품과 시험기준을 개발 완료하면서다. 업계에선 이를 효시로 국내 산업 기반을 닦을 수 있다는 기대감도 나온다.
한국생산기술연구원 컨소시엄은 지난 10일 산업통상자원부 산하 한국에너지술평가원의 지원을 받아 수행 중인 ‘제주지역 그리드포밍 관성제공자원 개발 및 실증과제’ 성공 보고회를 개최했다. 보고회는 그리드포밍 인버터의 개발과 실증을 통해 제주지역 전력계통의 안정성을 강화하고, 관련 기술의 상용화 및 표준화를 위한 중요한 발걸음을 내디뎠다는 평가다.
이번 과제는 지난 2022년 4월에 시작된 정부 출연금 20억원 규모의 사업이다. 그동안 시제품 하드웨어 및 소프트웨어 개발과 단체표준, 시험기준 수립을 병행한 가운데, 2023년 9월 말부터는 실제 사이트 설치를 통해 제품의 성능을 실증하는 과정을 거치는 중이다.
남태식 한국생산기술연구원 선임연구원은 “2021년 출력제어 문제 대두로 시장 및 학계에서 그리드포밍의 필요성에 주목했고, 그 계기로 이번 과제가 마련됐다”며 “중장기 계통 대책과 비교해 부족했던 단기대책으로서 전압제공과 함께 신속한 시공이 가능한 이번 사업을 제시한 것”이라고 취지를 설명했다.
남태식 선임은 “개발한 그리드포밍 인버터가 전력시장과 망 강건성에 얼마나 기여할 수 있는지 과제를 통해 확인했다”고 강조했다.
이번 과제에는 주관연구개발기관인 한국생산기술연구원을 비롯해 ▲한국스마트그리드협회(단체표준개발) ▲한국산업기술시험원(시험항목 및 절차 개발) ▲한국그리드포밍(소프트웨어 및 제어기 개발) ▲파이온일렉트릭(하드웨어 개발 및 성능개선)과, 전력거래소 내부 위원회(시장운영규칙 기반 계통평가위원회, 산업부 고시 기반 신뢰도협의회) 등이 동참하며 사업의 실효성을 높였다.
◆ “동기조상기 대비 저렴해 계통 안정화 효과 극대화”
그리드포밍(Grid-Forming)이란 회전체가 없어 관성 제공이 어려웠던 인버터 발전원(태양광, 풍력) 등에 인공관성을 부여해 ‘계통을 형성하는’ 안정화 기술이다. 기존에 회전체 기반의 동기발전기가 수행하던 포밍 능력을 신재생에너지 발전원에 부여하면서 전압형성 및 주파수 조정 등 계통의 신뢰도와 강건성을 높이는 능력을 갖추게 하는 기술이다.
업계에선 그리드포밍 인버터의 도입이 급증하는 신재생에너지 전원의 안정적인 계통 정착을 지원하고, 나아가 주류 발전원으로 거듭나기 위한 관문이라고 소개한다. 그리드포밍 제품은 이미 영국과 미국, 호주 등 선도국의 공공입찰사업에서 높은 경제성을 보였고, 예비력 시장을 통해 시장과 계통 기여 능력을 증명한 상황이다.
영국에서 진행된 사업에선 그리드포밍 제품이 동기조상기 대비 관성 제공 서비스에서 88%, 고장전류 서비스에서 28% 더 저렴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번에 컨소시엄이 개발 및 실증성능을 증명한 그리드포밍 인버터 ‘그리드포머(GridFormer)’는 동기조상기 대비 가격은 30% 수준으로 낮추면서, 조상기의 전압 부여 성능을 충실히 재현했다는 설명이다.
해당 인버터는 사업자의 전압기나 태양광발전설비에 간섭하지 않고도 ‘슈퍼커패시터’를 통해 계통 내 전압원을 제공하는 장점이 있다. 이 때문에 기존 전류형 스마트인버터로 통용되던 그리드팔로잉(계통추종) 제품과 비교해 안정성 및 계통 기여 측면에서 한 단계 나아갔다는 평가다. 더욱이 계통 변동 발생 시 ‘즉각’ 전압 투입이 가능하단 점에서 대응력도 높다.
제품의 소프트웨어 및 제어기 개발을 한 강지성 한국그리드포밍 대표는 “그리드포머 설치를 통해 ▲출력제어 감소 ▲전기발전원가 및 탄소배출 절감 ▲전력망 투자비용 절감 등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며 “미국에선 STATCOM, 배터리 ESS, 동기조상기 등 모두 별도로 투자되고 있는 현황을 개선하기 위해 가장 시급히 도입해야 할 기술 및 장비로 그리드포밍 인버터를 최적의 대안으로 지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더욱이 저렴한 외산 인버터가 범람하고 있는 국내 태양광 시장을 반전할 ‘와일드카드’로서도 이번 실증 성공은 의미가 크다.
컨소시엄 관계자는 “동기조상기와 여타 인버터 등은 해외 기술과 제품에 의존도가 높고 비용 대비 효과가 낮다”며 “반면 그리드포머는 국내 기술로 국내 제조사가 사업을 추진할 수 있어 산업과 시장을 형성하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 ‘객관성 담보’ 시험기준 수립으로 산업기반 마련
이날 보고회에서 한 가지 더 눈길을 끈 것은 제품 개발과 함께 진행된 시험항목 및 절차 개발 현황이었다. 시험기준을 개발 중인 한국산업기술시험원은 스마트인버터와 구분되는 그리드포밍의 개념을 다시 한번 정의하고, 전력망 안정을 위해 고장전류공급이나 관성응답 등 그리드포밍이 궁극적으로 구현해야 하는 기술기준을 명확히 제시했다.
이번 시험 항목 및 절차 개발에 대해 한국산업기술시험원은 ‘어느 시험자도 동일한 결과를 낼 수 있는 객관적인 시험 절차와 판단기준을 제시함으로써 그리드포밍 기술을 활용하는 계통 운영자부터 시험자와 제조사까지 모두 활용할 수 있는 시험절차를 개발하도록 노력했다’고 밝혔다.
전승욱 한국산업기술시험원 신재생에너지기술센터 주임연구원은 “국제표준화기구(IEC) 및 연구그룹에서 발표한 문헌과 워킹그룹 참여 경험에 기반해 불안정한 전력망의 회복을 위한 동작을 어떻게 일반 시험 구성으로 구현했고, 새롭게 기준을 제시한 것이 이번 활동의 골자”라며 “그리드포밍 인버터에도 KS C 8565(태양광발전 인버터 표준) 및 한국전력 기술기준이 요구됐지만, 이를 수용하며 그리드포밍 기술을 검증할 만한 평가항목을 수립하고 그리드포밍의 개념을 확보했다”고 설명했다.
특히 전압 저하 등 계통 사고에 대비해 마련된 기술인 만큼, 시험 환경도 더욱 극한의 환경을 조성했다.
전승욱 주임연구원은 “기존 태양광 인버터에 적용하는 시험과 달리 전압, 위상, 주파수 등을 동시에 급변하는 시험항목을 만들고 가혹한 판정기준을 제시해 이전의 스마트인버터 시험기준과는 궤를 달리했다”며 “전압-무효전력, 주파수-유효전력 강하 반응 등 비슷한 시험항목에 대해 5초 이내에 반응을 제시하는 스마트인버터와 달리 100ms 이내의 굉장히 빠른 반응을 요구하며, 별도의 절연 없이 병렬로 구성해 동기기능을 확인하고 그리드포밍 인버터의 성능을 다방면으로 검증한다”고 말했다.
마지막 관건은 이번 과제가 실제 산업계에 얼마나 뿌리내릴 수 있느냐다. 계통 보강을 위해 전압 불안정 지역에 활발한 공급이 필요한데, 보급 여건은 계통 운영자의 정책 여하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컨소시엄 관계자는 “수요자인 한전 및 전력거래소 측에서도 필요성에 대한 인식과 기술력에 대한 높은 신뢰를 보이고 있지만, 보급을 담당할 산업체와 발전사업자들에게 충분한 혜택이 주어져야 상용화의 기반이 마련될 수 있을 것”이라며 “내년에 개설 예정인 속응성 예비력 시장이 다양한 인센티브를 제공해 사업 유인을 키워줬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