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눈) 미국 계통운영의 저력
얼마 전 미국 여행의 단상이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요세미티 국립공원으로 향하는 여정은 단색의 초원과 하늘이 끝 없이 이어지는 ‘여백’의 연속이었다. 이를 메우는 것은 줄지어 늘어선 대규모 송전탑, 풍력발전소뿐이었다. 국내에선 깊숙한 산골짜기에 위치한 설비들이, 이곳에선 주변과 어우러지고 있다.
샌프란시스코 시내에서도 생경한 풍경이 이어졌다. 집집마다 지붕 위 태양광이 즐비하고, 이따금 모퉁이를 돌면 주택가와 바로 이웃한 대규모 변전소와 마주친다. 주민들의 거부감과 혐오시설이란 인식이 팽배한 우리네 사정과 상반된 모습이다.
흔히들 '땅이 넓어서' 상대적으로 민원과 수용성 문제가 적으리라 생각되는 미국이지만, 이들의 전력망 공급 역시 순탄치만은 않다. 한 겹만 뜯어보면 지리한 쟁의와 이에 대응하는 당국의 부단한 노력이 있다.
미국 연방에너지규제위원회(FERC)는 ‘대안적 분쟁 해결 프로그램(ADR)’을 통해 전력 인프라 건설의 갈등을 적극적으로 중재한다. ADR은 재산피해 보상을 비롯해 ▲전력망 경로 지정 ▲토지확보에 특화된 프로토콜이다. 수용성 업무를 전담하는 분쟁해결서비스(DRS)팀은 전문 훈련을 통해 갈등 해결, 예방, 협상 등을 습득하고, 자문·워크샵 등으로 ADR 활성화를 지원한다.
FERC는 이 과정에서 상당 규모의 일자리도 창출하고 있다. 워싱턴 DC 본부를 포함해 미국 각지에 근무하는 직원은 1500명을 넘어선다. 이들의 급여는 2020년 기준 초봉 2만7600달러(한화 약 3700만원)에서 최대 17만달러(23억4000만원)에 달한다.
ADR 제도는 유연하고 중립적인 운영으로 비용과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는 평가다. 정부의 뒷받침 속에 전력망 공급의 단단한 토양을 다질 수 있었다는 의미다. 이 덕에 바이든 정부는 올해 장기 송정 계획을 통해 향후 20년간 현재 대비 두 배 규모의 전력망 건설을 착착 실행에 옮기고 있다.
‘국가기간 전력망 확충 특별법’ 속에서도 같은 고민이 엿보인다. FERC와 유사한 ‘전력망확충위원회’의 감독 아래 입지를 선정하는 한편, 토지주 가산금 및 보상비 지급과 설비 주변 지역의 특별지원도 가능케 했다. 이전에도 수용성 제고 활동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국가 단위의 에너지 민원 전담 조직을 구상한 것은 이번 특별법이 처음이다.
이를 관철할 수 있었던 기회는 21대 국회의 임기 만료와 함께 ‘자동폐기’ 됐다. 주민 사이로 녹아드는 전력망을 위해 규제기관이 직접 나서야 할 적기라는 생각에 아쉬움이 크다. 새로 출범할 22대 국회는 무의미한 경쟁에서 벗어나 수용성 제도 기반 마련의 기회를 잡는 시기로 남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