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소에 의존하지 않는 국가 또는 탄소중립을 실행하는 국가의 정치질서는 어떤 모습일까? 비록 현재 시점에 숫자로 계량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탄소중립이 국가경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임은 명백하다. 그런데 탄소중립이 국가의 정치질서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생각은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경제든 정치든 모두 희소한 재화를 배분하는 메커니즘이다. 시장경제 하에서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이 재화의 배분을 결정한다면 정치는 국가권력이라는 수단을 통해 재화의 분배에 직접 개입한다. 따라서 탄소중립이 어떤 식으로든 재화의 배분에 관한 정치질서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근대 이후 자유민주주의의 번영은 자본주의의 발전과 밀접한 상관관계를 가져왔다. 고대로부터 내려온 귀족체제가 일순간 붕괴하면서 부르주아와 농민의 신분 해방이 이루어진 역사 그리고 노동자와 여성이 선거권을 쟁취해나간 역사를 돌이켜 보노라면 인간으로서의 자유와 평등은 절대권력의 시혜적 조치에 의해 부여된 것이 아니라 그 수혜자들이 자본주의경제 하에서 정치경제적 잉여 자원을 축적하고 이를 행사함으로써 쟁취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반면에 노동자 해방을 약속한 공산주의 경제체제는 정작 노동자 계급에 정치경제적 잉여 자원을 분배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기에 공산주의 국가는 표를 던지는 사람이 아니라 표를 세는 사람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허울뿐인 민주주의 국가였다. 진정으로 자유는 공짜가 아닌 것이다(Freedom is not free)!

그리고 자본주의 세계에서 물질문명의 극단을 향해 치달아 가는 인류의 구세주는 단연코 탄소였다. 전기, 수송, 농축수산, 제철, 빌딩을 비롯한 그 어떤 현대 물질문명도 탄소를 벗어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이와 같이 자유민주주의를 견인해 온 자본주의가 탄소에 기반해 구축되었다고 한다면 우리의 자유민주주의는 문명사적 관점에서 ‘탄소민주주의’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천연가스 비료를 통해 생산된 값싼 음식을 먹으면서, 석유를 동력으로 하는 선박에 실려온 원두로 만든 커피를 마시면서 혹은 석탄 내지 LNG 발전소의 전기로 작동하는 TV 또는 SNS를 보면서, 타인과의 소통을 통해 정치경제적 자원을 축적하고 행사할 수 있는 풍요와 번영의 시대였다.

이제 인류는 물질문명에서 탄소를 과감하게 끊어내려 한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인지 그리고 자본주의 경제에 어느 정도의 영향을 미칠지는 아직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인류가 자본주의 하에서 한껏 누려온 풍요의 시대는 저물고 인류는 결핍의 시대를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탄소중립은 탄소를 유발하는 재화의 생산을 강하게 억제할 것이지만 인간의 재화에 대한 근원적 욕구마저 잠재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필자의 예측으로는, 재생에너지와 수소가 탄소를 대체할 경우 결코 현재와 같은 재화의 생산 수준이 유지될 수 없을 것이다.)

탄소민주주의 시대에 경제성장은 당연한 것이었고 결코 중단돼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경제성장의 둔화 또는 퇴보는 종종 사회의 분열과 극단적 계층 갈등으로 이어져 민주주의의 위기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탄소중립이 초래할 결핍에 국가가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는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매우 중대한 도전과제가 될 것이다.

특히 훨씬 희소해진 재화를 누구에게 어떻게 배분할 것인지, 그리고 누가 결정할 것인지의 문제는 매우 민감한 정치적 주제가 될 것이다. 만약 가격이 모든 것을 결정하도록 한다면 그리해 부유한 자가 더 많은 재화를 제한 없이 소비할 수 있도록 한다면 결핍의 시대에 국가가 대다수 국민에게 인간다운 삶을 보장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해서 국가가 전국민에게 평등한 복지를 보장한다는 명분으로 배급시스템을 도입한다면, 그 배급시스템은 몇몇 정치특권층의 극악무도한 부정부패로부터 자유롭게 작동할 수 있을까? 보다 근본적으로, 사회적 약자가 탄소민주주의 하에서 누려왔던 정치경제적 자원을 축적하고 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잃게 된다면, 더 이상 자유민주주의가 유지될 수 있을까?

탄소중립은 아마도 탄소민주주의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현대 자유민주주의의 근본적 취약성을 드러낼지도 모른다. 탄소중립의 실행방안과 그 거버넌스에 대한 더욱 깊은 국가적 고민이 필요하다.

프로필

▲서울대학교 사법학과 ▲법무법인(유한) 태평양 변호사▲해외자원개발협회 연구위원 ▲국민연금공단 대체투자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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