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신문 윤정일 기자] 지난 2009년 10월 한국토지공사와 대한주택공사가 통합돼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출범할 당시 이 거대 공기업의 부채는 134조원에 달했다.

부채가 많기로 소문난 네트워크 산업의 공기업들, 가령 한전(50.7조원), 한국도로공사(28조원), 국가철도공단(20조원), 한국철도공사(17조원)의 부채를 합친 것보다도 많았다. ‘서민들의 주거안정’을 위해 저렴한 임대주택을 많이 건설·관리하면서 누적된 빚이다.

때문에 그동안 LH는 토지매각 수익을 높이면서 한편으로는 돈이 될 만한 자산들을 내다 팔고, 허리를 졸라매는 방식으로 부채절감에 주력해왔다. 덕분에 LH의 부채규모는 126조6800억원(2019년, 국회 예산정책처 자료 기준)으로 다소 줄었다.

LH의 1년 지출액(45조4890억원)이 사업수익(20조9427억원)보다 2배 이상 많은 상황을 고려하면 나쁘지 않은 성적표로 볼 수도 있다.

그러다가 LH가 전 국민의 ‘공공의 적’이 된 것은 올해 3월.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가 3기 신도시 중 하나인 경기 광명·시흥 지구에 LH 직원들이 사전에 100억원대의 토지를 매입했다는 투기 의혹을 제기한 것이다. 조사결과 의혹은 사실로 밝혀졌고, 이 문제는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실정과 맞물리면서 일파만파 확산됐다. 일부 직원들의 일탈, 감사시스템의 부재가 정치권과 언론을 거치면서 ‘조직을 해체해야 하는 근원적 결함’으로 둔갑했다.

그 탓에 LH 사태가 불거진 3월 초부터 정부가 LH 혁신안을 내놓은 시점(6월 7일)까지 총 17명의 고위직이 조직을 떠났다고 국회 김은혜 의원실은 밝혔다.

이를 놓고 퇴직금 먹튀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LH 직원으로서의 상실감에 대한 표현이자 간부급의 취업제한 조치를 피하기 위한 현실적 결정으로 받아들여진다. 정부는 6월 7일 LH 혁신안을 발표하면서 상임이사, 비상임이사 등 임원에게만 두던 취업제한을 1·2급직까지 확대한다고 밝혔다.

또 김 의원실은 올해 1~7월까지 퇴직한 LH 직원 중 10년 이하 실무급의 숫자가 74명이나 된다고 밝혔다. 올해 전체 퇴직자 174명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숫자가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LH라는 공기업 직장을 포기하고 이직을 결심한 것이다.

이 같은 LH 직원들의 ‘탈출러시’는 당장 조직의 사기저하뿐만 아니라 장기적으로 조직의 경쟁력을 약화시키고, 공공주택 정책을 후퇴시킨다는 점에서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 LH 직원에게 직접 들은 사례는 LH에 대한 일반의 인식이 어느 정도 나빠졌는지를 엿볼 수 있다.

부서 정기 봉사활동을 위해 최근 농촌을 찾았다는 LH 직원은 “어디서 왔느냐”는 할머니 물음에 “LH에서 왔다”고 답하니까 “LH에서 왜 여기를 왔느냐, 땅 투기하는 나쁜 사람들이 봉사활동을 한답시고 사진 찍고, 여기저기 홍보하려고 온 것이 아니냐”면서 “당장 돌아가라”고 했다면서 그 모습을 보고 다시는 봉사활동을 하고 싶지 않게 됐다고 털어놨다.

LH에서 일하는 대부분의 직원들은 땅 투기와 무관한 평범한 직장인이다. 이들은 공기업에서 일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법에서 정한 임무를 묵묵히 수행하고 있다. 그동안 국민주거안정 실현과 국토의 효율적 이용을 위해 노력한 공헌은 외면하고, LH를 탈법과 관행만 난무하는 공기업으로 낙인찍는 것은 곤란하다. 이번 LH 땅 투기 사건은 범죄행위를 저지른 일부 직원들을 일벌백계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시스템을 재정비하면 되는 일이다.

지금 얘기되고 있는 ‘LH 해체 수준’의 혁신안은 정답도 아니고, 효과도 없다.

저작권자 © 전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