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계 “중소기업은 대기업 하청 역할에 그치게 돼”

[전기신문 정재원 기자] 한전이 공공 에너지저장장치(ESS) 사업을 통합발주하겠다고 결론을 내리면서 업체들의 불만이 커지고 있다. 통합발주 시 사실상 설계·조달·시공(EPC) 대기업들이 시장을 주도할 수밖에 없는 방식이라, 중소기업들은 대기업의 하청업체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ESS 업계에 따르면 한전은 최근 이달 말 제주 금악에서 1단계 발주할 계획인 공공 ESS 사업의 입찰방식을 통합발주로 결정지었다.

한전은 ESS의 주요 구성설비인 배터리와 전력변환장치(PCS) 등을 분리하지 않고 통합해 입찰한다. 전 설비를 주관사업자 한 곳이 책임지고 구매, 시공하는 방식이다.

업계에 따르면 과거 한전이 추진한 화력발전소 주파수조정(FR)용 ESS 사업의 경우 배터리와 PCS 등을 따로 발주해 중소기업들이 각 분야에서 주도적으로 사업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전은 이번 사업부터 ESS 시스템 전체를 통합발주하는 방향으로 선회, 중소기업들의 불만이 커지고 있다.

ESS 시장은 제조 분야에서는 배터리를 제외하면 대부분 중소기업으로 이뤄진 시장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사업 전체를 총괄하는 사업자를 선정하는 방식으로 공공 ESS를 추진한다면, 충분한 규모를 가진 EPC 대기업들이 시장에서 주도권을 쥘 수밖에 없다는 게 사업자들의 주장이다.

지난 2017년 이후 수십 차례 발생한 ESS 화재로 인해 정부가 ESS 시장 활성화에 사실상 손을 놓고 있는 상황이다. 지난해 ESS 매출이 예년의 10분의 1도 안된다며 볼멘소리를 하는 중소기업들은 한전이 대규모로 추진할 계획인 공공 ESS에 기댈 수밖에 없다는 것.

공기업인 한전과 직접 거래를 한다면 적정한 낙찰가가 정해져 있는 만큼 제값을 받을 수 있지만, 대기업이 한번에 구매하는 상황에서는 사실상 최저가로 기업별 경쟁을 통해 납품을 해야 한다. 공공 ESS의 통합발주가 ESS 시장 활성화에 아무런 기여도 할 수 없다는 게 업계의 지적이다.

중소기업 관계자들은 한전의 이번 결정이 ESS 시장을 더 힘들게 할 것이라고 전했다.

업계 한 관계자는 “중소기업이 죽으면 남은 ESS 유지보수시장도 죽고, 앞으로 더 커질 유지보수시장마저 죽어 기술복구에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외국과의 경쟁에서도 밀린다”며 “시장이 가진 생태계를 고려해 발주방식을 결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전은 이 같은 중소기업의 불만을 의식했는지 중소기업들이 입찰에 참여할 수 있도록 문은 열어둔 모양새다. 그러나 ESS 업계는 이마저도 형식적일 뿐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한전은 컨소시엄 형태로 입찰에 참여할 수 있게끔 했다. 주관사가 입찰 자격만 만족시키면 배터리, PCS 업체와 함께 참여하고 제조사에 납품협약서를 받으면 된다. 제조사가 아니더라도 입찰에는 참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말 많았던 통합발주 방식은 ‘컨소시엄 형태’도 가능하고 실적 조건도 24MW 규모에서 7MW 규모로 떨어지는 등 입찰 조건이 완화돼 문호는 중소기업에까지 넓어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중소기업들의 반발은 여전하다. 결국 ‘대기업 하청’ 역할에 그치기 때문이다.

ESS 업계 한 관계자는 “자격이 여전히 까다롭기 때문에 대기업이 중심이 돼 중소기업은 하청업체가 될 수 밖에 없다”고 전했다.

또 “과거 분리발주 때는 업체들이 한전과 가격을 협상했기 때문에 중소기업들도 적정가격을 받을 수 있었다”며 “하지만 통합발주 방식은 EPC 대기업이 주관사가 돼 먼저 마진을 챙기기 때문에 중소기업까지 수익을 보기 힘들 것”이라고 답했다.

또 다른 관계자도 “한전이 사고 시 빠져나갈 구멍만 찾고 있는 것”이라며 “한전 요구대로 까다로운 자격요건을 다 갖추고 컨소시엄을 짜더라도 문제 발생 시 주관사가 책임지라는 건 이를 버틸 수 있는 대기업만 들어오라는 이야기”라고 말했다.

아울러 “공청회를 5번이나 열고 중소기업 이야기를 들어주는 척했지만, 결국 자신들이 원했던 통합발주 방식을 이뤄낸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한전 관계자는 “공청회를 했지만, 업계 불만은 없었다”며 “과거 PCS와 배터리 등을 서로 나눠서 분리발주를 하다 보니 사고 발생 시 책임소재 관련 관계사 간 분쟁 문제가 있었고 시공도 주요 설비 간 간섭이 발생해 시공 품질 저하가 우려된 점도 있었다”고 답했다.

한편 한전은 공공 ESS 사업을 통해 신재생에너지 증가에 따른 계통신뢰도 유지와 발전제약 완화를 위한 대안을 마련한다는 계획이다.

이미 FR용 ESS는 376MW 규모로 설치가 완료됐고 공공ESS는 앞으로 1단계 계통 신뢰도 확보를 위한 긴급물량 500MW, 2단계 발전제약 완화 관련 추가 필요 물량 900MW로 총 1.4GW 용량 구축이 예정돼있다.

이를 통해 15년간 운영 시 약 2조8000억원의 편익이 예상된다는 것이 한전의 설명이다. 한전은 이달 말 신재생에너지 증가로 출력제한이 걸리는 등 계통 문제가 심각한 제주 금악을 대상으로 입찰공고를 먼저 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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