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이 엉망이고 불만이 팽배할 때, 사람을 바꾸면 달라질 거라 생각한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상황에 좌절하고 그러다 분노한다. 목청 높여 외치며 광장으로 나가 촛불을 든다. 누가 강제한 것도 아닌데, 보상을 보장받은 것도 아닌데 그들도 나도 한 뜻이라는 확신에 투쟁한다. 마침내 사람이 교체된다. 승리감은 기대를 폭발시키고 분별력에 마취제를 투여한다. 마취력이 빠져나가면서 자꾸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선택, 그 뜨거운 연대감, 벅찬 쟁취감에 생채기를 내고 싶지 않다. 실망으로 향한 감정의 끝 날을, 개혁에는 고통이 따른다는 허상적 당위로 돌려세운다.

나와 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 검찰개혁이 국민의 염원이라 칭해지고, 쏟아낸 정책을 비웃는 냥 솟구치는 집값이 시장실패라 지목될 때 이상하다 싶지만 내가 잘 모르나보다 고개를 숙인다. 여론 조작이, 부동산 투기가 유죄 판결을 받아도 그 판결이 조작됐다 화를 내고, 법원이 잘못된 명령이라고 명시해도 명령자가 아니라 직무배제 당한 자에게 왜 사과하지 않느냐 강행하는 징계에 놀라지만 부끄러움은 내 몫이려니 눈을 감는다. 금지된 집회를 강행한 국민 향해 살인자라며 분을 참지 못하면서도, 연평도 10주기 당일 대기업 불러 우리 국민의 무참한 죽음 방조한 북한정권에 경제 협력하라는 요구에 이건 뭐지 싶지만 통치의 대의려니 숨을 고른다.

정권의 정점에서 과도하게 닦달하다 공무원을 결국 감사대상에서 피의자로 전락시킨 당사자들이 미안해하기는커녕 누구를 향하는지도 모를 호통을 치고, 지금 때가 어느 때인데 사찰이냐며, 희한하게 입수한 첩보 들이대며 위법성 감찰을 감행하고,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찾기조차 어려운 법을 그것도 지탄의 대상인 궤책으로 밀어붙이고, 이즈음 되니 뭔가 있나보다 다시 쳐다보게 된다.

절차적 정당성을 주장하지만 그 정당성을 창작하기 위해 단독, 기습, 편법이 난무하고, 유리한 폭로라면 사기꾼의 협잡도 정의로 포장되지만 곤경에 처할 제보는 진실이라도 가짜뉴스로 색칠된다. 국민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방역이 통제의 도구로 둔갑하고, 정치에 오염된 정책에 애먼 피해자가 눈물 흘린다. 책임과 포용, 겸양과 성찰을 밀어내고 위선과 적반하장, 후안무치와 오만방자가 권력행사 조건이 되었다. 하필 이 때 마키아벨리즘이 떠오르는 건 세상 바뀐 걸 모른 탓일까.

특정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잔인하고 부도덕한 수단마저 허용되고 정당화된다며 밀어붙이는 걸 우리는 흔히 마키아벨리즘이라고 일컫는다.

“지도자는 아랫사람들이 자기를 두려워하면서도 동시에 존경하도록 만드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그러나 어느 한쪽을 불가피하게 선택하는 경우라면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편이 더 안전하다. 현명한 군주는 잔인하면서도 능력이 뛰어난 부하를 시켜서 점령지역을 다스리게 한다. 가혹한 지배와 처벌에 주민들이 불만을 품으면, 그는 자기가 그런 명령을 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고 말하며 모든 탓을 부하에게 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정기적으로 축제나 쇼를 개최하고 국민들과 함께 어울려 자신의 인간미와 넓은 아량을 보여주면서도 위엄은 항상 유지해야 한다.”

군주론에서 이렇게 말한 마키아벨리조차, 잔인한 짓을 처음에 적게 하다가 날이 갈수록 많이 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짓은 없다면서 경고를 덧붙였다. 그런 지배자는 자기 지위를 오랫동안 유지할 수 없다고, 지위가 사람에게 명예를 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그 지위를 명예롭게 하는 것이라고.

“당신이 품은 불만의 원인을 해소시키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권력자의 얼굴만 교체하는 혁명에 시간을 낭비하지는 마라. 새로운 권력자가 등장해도 당신은 여전히 불만을 품을 것이다. 그들은 모두 능력이나 자질이 똑같은 인물이 아닌가.”마키아벨리의 절친 귀치아르디니의 이 충고를 숙지했더라면 달라졌을까.

저작권자 © 전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