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신문 안상민 기자] 사전을 보면 “공감능력은 타인의 사고나 감정을 자기의 내부로 옮겨 타인의 체험과 동질의 심리적 과정을 만드는 일”이라고 언급돼 있다.

상대 입장을 고려하고, 상대의 심정을 깊이 헤아리는 공감능력은 개인이나 기업의 정서와 성향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기준 중에 하나다.

지난 8일 승강기 대기업 A의 협력사와 계약을 맺고 일하던 근로자가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비보가 들려왔다. 이 근로자는 A기업에서 받고 있는 대우가 부당하다고 호소하며 협상을 요구했으나 회사 측으로부터 거절당했다고 동료 근무자들은 증언했다.

평소 생활고에 시달리던 이 근로자는 결국 극단적 선택으로 생을 마감했다.

A사가 이 죽음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단언할 수 없다. 다만 정황상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부정할 수도 없어 보인다.

현재 이 근로자가 극단적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에 대해서는 경찰이 조사 중이며, 다만 이 작업자가 A사와 갈등을 빚고 있었다는 점에서 이 사고와 A사를 완전히 분리해놓고 생각하는 것은 쉽지 않다.

기자가 지적하고 싶은 부분은 이 근로자의 죽음에 대한 A사의 반응이다.

만약 A사가 이 사고를 두고 ‘원인을 떠나 책임을 통감한다’거나 ‘우선 유족에게 깊은 조의를 표하며 사건 조사가 끝날 때까지 조심스러운 입장을 고수하겠다’는 식으로 대응했다면 기자가 이렇게까지 답답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A사는 취재 과정에서 “유서가 발견됐나”, “이 근로자의 죽음에 회사가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나” 등 A사를 위해 일하던 근로자의 죽음과 완벽히 선을 긋는 행태를 보였다.

심지어 동료 근로자들의 증언의 신빙성을 되물으며 ‘아무 말이나 기사에 실어주는 것이냐’며 기자를 질책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기자 입장에서 A사, 그리고 죽은 동료의 곁을 지키는 동료 근로자는 똑같은 취재원일 뿐이다.

A사, A사와 계약을 맺고 설치공사를 진행하던 근로자들이 도급비 인상 문제를 놓고 갈등관계에 있는 상황에서 근로자 중 한 명이 생활고로 인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면 동료 근로자의 증언을 토대로 기사화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대기업이라고 해서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지도 않고, 열악한 근로자라고 해서 동정의 시각으로 보지도 않는다.

살다보면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다. 이 선은 내가 넘어서도 안 되지만 남이 넘어 와도 곤란하다.

예상치 못한 작업자의 죽음으로 당혹스러웠을 A사의 입장도 이해가 되지만 그렇다고 자신들의 회사를 위해 땀 흘려 일했던 근로자의 죽음에 자신들을 연관시키지 말라고 주장하는 그들의 대응은 분명 선을 넘은 것이다.

기업에서는 예상치 못한 일이나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일이 불시에 일어나곤 한다. 그 때마다 회피하거나 그 일과 선을 긋고 책임이 없음을 주장한다면 신뢰 받는 기업으로 평가받을 수 없다.

A사에 지금 필요한 것은 죽을 수밖에 없었던 근로자의 상황을 헤아리는 ‘공감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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