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핀란드 등 해외 선진사례 비결은 ‘국민 신뢰 확보’
투명·공정한 절차 바탕, 국민 수용성 높이는 데 집중 필요

핀란드 올킬루오토 섬에 건설 중인 온칼로(Onkalo) 사용후핵연료 영구처분시설 모습. 핀란드는 영구처분장 부지선정 과정에서 투명하게 정보를 공개해 영구처분장에 대한 수용성을 끌어올리는 데 성공한 대표적인 국가다.
핀란드 올킬루오토 섬에 건설 중인 온칼로(Onkalo) 사용후핵연료 영구처분시설 모습. 핀란드는 영구처분장 부지선정 과정에서 투명하게 정보를 공개해 영구처분장에 대한 수용성을 끌어올리는 데 성공한 대표적인 국가다.

[전기신문 정세영 기자] 사용후핵연료는 원전보유국의 가장 큰 고민거리다. 우리나라는 올해 2분기 기준으로 가동 원전 24기에서 총 50만1519다발의 사용후핵연료가 발생했다. 하지만 이를 원전 외부에 저장하거나 영구적으로 처분할 수 있는 시설이 없어 발생량 전부를 원전 부지 내에 임시 저장하고 있다.

한국방사성폐기물학회에 따르면 오는 2029년 한빛 원전을 시작으로 임시저장시설의 순차적인 포화가 예상돼 이를 안전하게 폐기하고 사용후핵연료를 영구적으로 격리할 수 있는 처분시설이 조속히 마련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 가운데 최근 국회 상임위에 상정된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에 관한 특별법’은 수십 년 넘도록 제자리걸음하는 사용후핵연료 문제의 해결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받고 있다.

전문가들은 법제화를 향한 첫 발을 뗀 사용후핵연료 문제에 대해 프랑스, 핀란드 등 해외 선진사례를 참고해 투명하고 공정한 절차를 바탕으로 국민 수용성을 높이는 데 방점을 찍어야 한다고 제언한다.

◆고준위 처분장 부지선정 실패의 교훈…법·제도 기반, 국민 신뢰 확보 시급

우리나라의 고준위 처분장 부지선정 과정은 한마디로 ‘실패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지난 1978년 국내 첫 원전인 고리 1호기 가동과 함께 방사성폐기물의 관리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한 이래 정부의 처분장 부지 확보 시도는 매번 격렬한 저항 속에 무산됐다. 주무부처 장관이 처분장 선정을 둘러싼 혼란에 책임을 지고 사임하기도 했다.

지난 1986년 정부는 1990년대까지 중저준위 처분장은 물론 고준위 처분장을 건설하겠다고 밝혔다. 첫 시도로 경북 울진, 영덕, 영일 등 3개 지역에서 부지조사를 실시하던 중 국회를 통해 처분장 건설계획이 알려지면서 해당 지역주민의 반대에 부딪혀 진행하지 못했다.

그 후 ▲1990년 안면도 ▲1993년 안면도·영일군 청하면 등 7곳 ▲1994년 양산·장안·울진·기성 ▲1995년 굴업도 ▲2000년 영광·고창·강진·완도 등 7곳 ▲2001년 울진·영덕·고창·영광 등 4곳 ▲2003년 부안 ▲2005년 울진·영광 등 10곳, 총 9차례에 걸쳐 처분시설 부지 확보를 추진했지만 후보지로 거론되는 곳마다 반대여론이 들끓으며 모두 무산됐다.

다만 이 과정에서 정부는 지난 2004년 중저준위 처분장과 사용후핵연료 중간저장시설을 분리해 추진키로 의결한 후 경주를 중저준위 처분장으로 최정 확정, 현재 처분시설을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대표적인 기피시설로 꼽히는 고준위 처분장 부지선정은 원자력계의 최고 난제다. 경주 중저준위 처분장은 부지선정에만 20여년, 준공까지 30여년이 소요됐다. 사용후핵연료는 국민인식에서 중저준위 방폐물과 엄연한 차이가 있어 고준위 처분장을 건설하는 데 얼마나 걸릴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이 때문에 고준위 처분장을 건설하려면 법제화와 공론화를 통한 국민 수용성 향상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지적이 끊임없이 제기돼 왔다.

특히 전문가들은 프랑스와 핀란드 등 해외 선진사례를 참고해 사용후핵연료의 안전한 관리를 위한 법과 제도를 우선 견고하게 수립해야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

프랑스 국영원전기업 오라노(Orano)가 라아그 지역에서 운영 중인 사용후핵연료 재처리시설. 프랑스는 방사성폐기물관리법에 따라 오는 2025년부터 심지층처분을 본격 시작한다.
프랑스 국영원전기업 오라노(Orano)가 라아그 지역에서 운영 중인 사용후핵연료 재처리시설. 프랑스는 방사성폐기물관리법에 따라 오는 2025년부터 심지층처분을 본격 시작한다.

◆핀란드 “영구처분장”, 프랑스 “핵연료 재처리”…키워드는 ‘법제화·공론화’

사용후핵연료 관리정책은 에너지 수급상황과 기술수준, 국민 수용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결정한다. 미국, 스웨덴, 핀란드 등 7개 국가는 영구처분을, 프랑스, 일본 등 4개 국가는 재처리 후 처분정책을 택하고 있다.

핀란드는 철저한 공론화 과정을 거쳐 사용후핵연료에 대한 국민 수용성을 높이는 데 성공한 대표적인 국가다.

핀란드 정부는 지난 2015년 원전 2기가 가동 중인 올킬루오토 섬에 전 세계 최초로 사용후핵연료 영구처분장 건설을 승인했다. 오는 2023년부터 핀란드에서 발생하는 사용후핵연료는 이 시설에서 처리될 예정이다.

핀란드가 영구처분장 건설에 성공한 비결로는 감독기관인 스툭(STUK)의 역할이 컸다는 분석이다. 스툭의 독립적 지위에 대한 핀란드 국민의 신뢰도는 매우 높다. 현지 여론조사에 따르면 스툭에 대한 국민 신뢰도는 83%에 이른다.

스툭은 영구처분장 부지선정 과정에서 투명하게 정보를 제공하고, 지역주민들에 대한 강의나 워크숍을 주관했다. 특히 잘못된 정보로 인한 갈등을 줄이기 위해 정보를 비교해볼 수 있도록 했다.

프랑스는 특별법을 제정해 고준위 처분장 건설의 돌파구를 마련한 대표적인 국가다.

프랑스는 지난 1989년 정부 주도로 처분장 부지선정 작업에 착수했다가 민란 수준에 이르는 폭동이 일어나 군대를 동원해 가까스로 진압했다. 같은 해 크리스찬 바타이유 의원은 ▲처분장 부지 조사 ▲폐기물 처분 방법 연구 ▲심지층 처분 이외 처분 방법 조사 등을 담은 방사성폐기물관리연구법을 마련해 국회를 통과했다.

이어 지난 2006년 공론화 과정을 거쳐 사용후핵연료 관리 정책을 담은 방사성폐기물관리법이 제정돼 프랑스는 오는 2025년부터 심지층처분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이제 ‘첫발’ 뗀 사용후핵연료 법제화…남은 과제는?

최근 국회 상임위에 상정된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에 관한 특별법은 처분장 부지 선정 절차와 부지 주변 지역 지원에 관한 사항을 담고 있다. 또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사업 전담조직으로 국무총리 소속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위원회의 신설을 예고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의 특별법에 대해 그간 지지부진했던 사용후핵연료 현안 해결에 필요한 사항들이 포함돼 드디어 처분장 건설을 향한 ‘첫 발’을 뗐다는 평가가 나온다.

원자력 전문가들은 법안 마련이라는 첫 단추를 잘 꿰어야 법에 따른 후속 절차를 이어갈 수 있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 추후 입법공청회와 법안 심사과정에서 논의돼야 할 보완점이 산적해 있다는 지적이다.

먼저 사용후핵연료 관리정책의 핵심인 행정위원회의 권한과 책임, 구성이 다소 안일하게 규정된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특별법은 신설 행정위원회를 사용후핵연료 관리업무의 독립적인 수행을 위해 범정부적인 협조를 받을 수 있도록 국무총리 소속으로 두되, 국무총리의 행정감독권을 적용받지 않도록 규정하고 있다.

한 원자력 전문가는 “행정위원회에 독립된 권한을 보장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국회가 직접 나서 영구처분장 부지 확보를 비롯한 사용후핵연료 관리업무 전반을 챙길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행정위원회의 구성과 관련해 특별법에 당연직 위원이 빠져 있는 점도 차후 행정위원회와 관련 부서 간 업무 협조 과정에서 장애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또 다른 전문가는 “사용후핵연료 관리업무는 행정위원회 단독으로 추진할 수 없고, 추후 원안위를 비롯해 과기부, 산업부, 환경부, 국토부 등 범정부적인 협조가 필요할 수밖에 없다”며 “위원 구성에 이들 부서가 당연직으로 참여해야 원만한 업무 협조가 가능하지 않겠냐”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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