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락 산업통상자원 R&D 전략기획단 에너지산업MD
손정락 산업통상자원 R&D 전략기획단 에너지산업MD

탄소중립 R&D 전략을 골몰하는 중 고민이 생겼다. 국가 에너지 기술 개발 사업은 올해 1조원 수준으로 꾸준히 규모가 증가돼 왔음에도 당장 탄소중립에 동원 가능한 기술들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오랜 기간의 스마트그리드 기술 개발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전력망 혁신은 아직 요원하다. 이산화탄소 포집 및 저장 기술은 탄소중립을 위한 규모의 논리를 논하기에는 거리가 멀다. 연료전지는 수소자동차 상용화 성공에도 불구하고 발전용 영역에서는 아직도 해외 기술 의존도가 높은 것이 현실이다. 태양광, 해상풍력 등 적지 않은 재생에너지 기술개발 투자에도 글로벌 경쟁력 확보는커녕 국내 시장을 지키기도 버거운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은 어쩌면 절실함의 결여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간의 국가 에너지 기술개발의 결과물들은 이제 탄소중립이라는 전쟁에 동원 가능한 무기로 거듭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욱 절실함으로 무장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탄소중립 기술개발의 목표는 기술 확보가 아니라 탄소중립에의 기여가 돼야 한다. R&D 기술수준 분류 상 기술개발 완료에 해당되는 단계인 TRL 9은 실제 상황에서의 적용 준비가 돼있음을 의미할 따름이다. 실질적으로 탄소중립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추가적으로 실증(Demonstration)과 확산(Deployment)에 해당되는 스케일업(Scale-up) 과정이 필요하다. 실증이란 제한된 조건에서의 기능을 확인하는 과정이고 확산은 실증된 기술의 실제 환경에서의 적용을 확대하는 과정이다. 기 확보된 기술이 탄소중립에 기여하려면 이 스케일업이라는 죽음의 계곡을 건너야만 가능하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에너지 기술수준 분류를 TRL 9을 넘어 실증(TRL 10)과 확산(TRL 11)으로까지 확장해야 한다고 제안하고 있다. TRL 9 이후의 과정들을 Beyond R&D라고로도 부를 수 있겠다.

우리나라 자발적 온실가스 감축 목표(NDC)의 달성 목표년도인 2030년을 기준으로 그 이전에는 그간의 많은 투자로 현재 상용화에 근접한 무탄소/저탄소 기술들을 최대한 동원해야 한다. 태양광, 풍력, 전기차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러한 기술들의 대규모 실증들이 적극적으로 전개돼야 하며 공공 조달 등으로 국산 기술들을 보급 확산시켜야 한다. 핵심은 스케일업이다. 각종 실증 사업을 위해서는 에너지 공기업 보유 설비들을 동원할 수 있을 것이며 이를 장려할 수 있는 규제 혁신이 뒷받침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시장을 움직이는데 필요한 전력 계통 혁신과 충전 인프라 구축은 필수사항이다. 스케일업을 통한 실증과 보급 확산은 국내 기술의 국제적 경쟁력 확보를 위한 트랙레코드 확보에도 큰 힘이 될 것이다.

최근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논의가 진행 중인 각종 혁신기술들의 탄소중립 기여는 현실적으로 2030년 이후가 될 것이다. 대규모 에너지저장, 청정수소, 이산화탄소 포집, 저장 및 활용(CCUS) 기술들이 이에 해당한다. 문제는 아직도 이러한 기술들의 정확한 형체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대규모 에너지 저장 기술은 어디로 진화할지 모르겠다. 청정수소는 어디서 만들어 어떻게 운송할 것인가는 여전히 안갯속이다. CCUS와 관련된 가장 큰 난제인 저장소 확보는 아직 오리무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기술들은 늦어도 2030년부터 스케일업에 들어갈 수 있도록 지금부터 기술개발을 서둘러야 한다. 그래야 10년 정도 스케일업 이후 10년 정도 탄소중립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이런 혁신기술들이 탄소중립 달성에의 기여를 적게는 30%, 많게는50% 정도로 보고 있다. 어쩌면 지금 상황에서 동원 가능한 모든 수단들을 동원하더라도 탄소중립 달성이 힘든 부분들을 혁신 기술이라는 용어로 포장해서 훗날로 미루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탄소중립을 계기로 장밋빛 청사진만으로 기술 개발 당위성을 주장하는 것은 또 다른 그린워싱(Green Washing)이다. 스케일업을 고려한 기술개발 전략은 진짜 탄소중립에 기여 가능한 기술 개발들을 가려낼 수 있는 현실적인 수단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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