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아웃 언젠가 일어날 일…전력산업계 전체가 머리 맞대야”
거래소 위상 강화, 지방분원 더 두고 충분한 백업설비 갖춰야
진영논란 ‘탈원전’ 실패한 정책...로드맵 짜고 차근차근 공론화했어야

‘88만원 세대’의 저자인 경제학자 우석훈 박사가 이번에는 ‘전기’를 소재로 한 장편소설 ‘당인리’를 발간했다.

20년 가까이 좁게는 환경과 에너지, 넓게는 생태 분야에서 활동해 온 우 박사는 이 책을 통해 우리 국민들이 매일 편리하게 사용하는 전기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고 말한다.

특히 사람의 실수든 자연재해로 인해서든 전 계통 정전(블랙아웃)이라는 국가재난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많은 전력업계 종사자들이 묵묵히 일하고 있다는 점도 알리고 싶었다고 말한다.

지난 18일 평창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우 박사는 책에 대한 얘기로 시작해 ‘탈원전’ 같은 에너지 이슈, 그리고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등에 관한 이야기를 거침없이 쏟아냈다.

▶블랙아웃과 블랙스타트를 소재로 한 소설 ‘당인리’를 쓰게 된 배경은.

“당인리 발전소가 지하로 들어가는 걸 보면서 궁금했어요. 시민들에게 개방되는 일반견학 프로그램을 활용해 공사 중인 발전소도 가 보고, 전력거래소도 방문해 얘기도 들어보고 하면서 이곳을 소재로 책을 한 번 써봐야겠다 했죠. 또 제가 아는 무지 똑똑한 친구 하나가 서울에너지공사 공채에 지원했다가 떨어지고 엄한 친구가 붙는 걸 보고 좀 이상하더라구요. 그래서 이 둘의 모티브를 잘 엮어서 이야기를 하나 만들어보자고 생각했죠. 사실 높으신 분들 입장에서 보면 중부발전이든 서울에너지공사든 하찮게 보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이곳에서 일하는 직원들도 하나의 큰 성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도 보여주고 싶었어요. 현실에서는 어떤 성과가 있으면 높으신 분들이 생색은 다 내고, 일이 잘못되면 밑의 직원들이 징계받는 게 비일비재하거든요.”

▶당인리를 준비하면서 가장 크게 도움을 준 분이 있다면.

“제가 아는 국회의원과 보좌관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기밀 자료인지는 모르겠는데, 국회를 통해 구하기 힘든 자료를 쉽게 얻을 수 있었어요. 또 전력시스템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은 ‘블랙아웃과 전력시스템 운용’이라는 책을 많이 참고했어요. 엄청나게 큰 도움을 받았죠.”

▶실제 2011년 9.15 순환정전이 발생하면서 전력거래소에서 운영 중인 EMS가 제대로 작동하는지에 대한 논란이 아직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언젠가 블랙아웃이 일어날 수 있다고 보시는지.

“100%죠. 1년 안에 일어날지 10년 후에 일어날지는 모르지만, 언젠가는 블랙아웃이 일어날 수 있다고 봐요. 사람이 하는 일에 100% 안전이란 것은 없어요. 시스템 자체가 불안정하게 돼 있고, 약점도 많아요. 또 산사태와 지진 같은 자연재해가 발생할 수도 있고, 송전선로와 발전소 고장이 파급될 수도 있죠. 이건 한전이나 전력거래소 차원에서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산업부 장관이 좀 더 신경을 쓰고, 전력산업계 전체가 머리를 맞대야 해요.”

▶이 책에는 중부발전 소속의 인물들이 많이 나오는데요. 실존 인물인가요, 상상 속 인물인가요?

“원형이 있는 인물도 있고, 가공해 낸 인물도 있죠. 가장 공들여 만든 캐릭터는 당인리 계통팀의 신입직원 ‘하누리’에요. 처음 소설 기획 단계에서는 없었던 인물인데, 미국 NASA에서 계산원 임무를 맡은 ‘히든 피겨스’와 영화 마션의 민디 박사를 참고해서 만들어냈어요. 전형적인 너드(nerd, 지능이 뛰어나지만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거나 사회성이 떨어지는 사람)에요. 또 한 가지 재미있는 캐릭터는 나레이션 역할을 맡은 ‘오세영’이에요. 영화 ‘곡성’의 배우 곽도원을 원형으로 했어요.”

▶등장인물 중 특히 여성이 많은데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지.

“남성들은 위기의식 자체를 잘 못 느끼는 것 같아요. 코로나도 보면 여성이 위기를 잘 대처하잖아요. 실제로 위험하다고 판단해서 깊이 파고드는 남성은 별로 없어요.”

▶전기를 소재로 했지만, 다 읽고 나면 대한민국의 권력층과 의사결정 구조를 비판하는 정치소설로 느껴지는데요. 에너지 분야도 이러한 권력층의 비리나 의사결정 과정의 문제가 있다고 보시는지.

“우리나라는 민간이 아니라 정부주도로 에너지 정책을 수립하는데, 전문가들이 하는 게 아니라 몇몇 소수가 밀실에서 결정해요. 그래서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도 고칠 주체가 없어요. 전력시장 제도만 해도 이상한데 아무도 손을 안데요. 공식적인 논의도 틀어막고 있어요. 정치인이 해결할 수 있는 부분도 아니에요. 사실 청와대는 잘 몰라요. 또 수많은 보고서가 올라오는데 뭐가 중요한지 잘 모르다 보니 대통령한테 가기 전에 다 잘리죠. 그렇다 보니 충분한 논의 없이 급하면 졸속으로 결정하는 일이 많죠.”

▶현재 에너지산업은 산업통상자원부의 에너지자원실에서 주관하고 있는데, 에너지부로 독립할 필요가 있다고 보시는지.

“문재인 정부 공약에 원래 에너지부 신설이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사라졌어요. 최종공약에 빠졌는데 누가 뺐는지 아직도 못 찾았어요. 처음 하는 게 아니라 과거에도 동력자원부가 있었잖아요. 석유도 좀 있고, 관리만 한다고 하면 산업부에서 에너지를 관장해도 괜찮지만, 우리나라는 에너지 자급이 안 되다 보니 별도의 부처가 필요해요. 또 블랙아웃 같은 위험을 막고 리스크를 관리하려면 돈과 인력이 훨씬 더 많이 필요해요. 전력거래소의 위상을 강화하고, 지방에 분원을 더 둬서 충분한 백업설비를 갖춰야 돼요.”

▶에너지 분야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갖게 된 배경은 무엇인지.

“에너지공단에서 일하면서 기후변화 문제도 다루고, 전력거래소가 만들어질 때 시장제도 설계에 참여한 적이 있어요. 한국서부발전 사외이사를 하면서 전력산업에 대한 이해도 높아졌어요. 제가 이 책을 쓴 건 일반인들도 전기에 대해 좀더 관심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에요. 전문가들에게 맡기는 게 능사는 아니에요. 전계통 정전 발생시 통신문제는 기술적으로 답이 없어 지금이라도 대책을 만들어야 해요. 또 원자력발전은 외부전원이 끊기면 자가발전으로 돌리기 힘듭니다. 위기관리에 대한 종합대책과 매뉴얼을 만들어야 합니다.”

▶대한민국은 탈원전을 두고 보수와 진보 간 논란이 심각합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방향은 맞는데 100% 청와대의 행정 실패라고 봅니다. 목표만 있지 ‘어떻게’가 없어 과정에서 실패한 정책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신고리 5,6호기 공론조사부터 잘 못 됐다고 생각해요. 구체적인 로드맵을 짜고, 시나리오별로 검토부터 차근차근히 한 후 공론화를 했어야죠. 그냥 공론화했다는 것으로 면피하려고 했어요. 아주 비겁한 사람들이에요. 기술과 기술이 부딪히고 경제와 경제가 만나서 절충점과 균형을 찾았어야 했는데, 우리나라는 신념 대결로 편가르기하고 싸워 이기는 쪽이 우리 편이라는 식이었어요. 밥그릇을 지키기 위한 싸움으로 번졌죠. 기술의 문제인데 정서로 접근하는 방식, 이것은 정치도 아니에요. 그래서 에너지부가 필요한거에요. 에너지부가 책임을 지고 이걸 해야죠. 지금처럼 해서는 무책임하고 과정이 생략된 일들이 또 벌어질 거에요.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 돼 버리고 만 거죠.”

▶페이스북 등 SNS 활동이 활발하신데요. 다루는 내용도 경제부터 아이들과의 일상, 각종 정치사회문제 등 다양합니다. 시간 관리는 어떻게 하시는지.

“남들보다 책을 많이 읽는 편입니다. 또 낮에는 아이들을 돌보고 있는데 벌써 4년이 됐네요. 아이들을 오는 시간에 정위치에 있어야 하다 보니 고정적인 약속도 어려워요. 밖에 나가서 술 먹는 것도 일주일에 한 번 정도에요. 남는 시간에 페이스북에 글을 남기죠.”

▶진보경제학자이신데 진보와 보수를 양쪽 다 비판하시는데요.

“저는 이념을 가리지 않고 제 생각이 맞다고 하면 할 말은 하는 편이에요. 비난하는 분들도 계시지만 저는 무딘 편이어서 그런지 마음에 안 담아둬요.”

▶마지막으로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

“소설 2~3권을 더 쓰려고 합니다. 바이러스로 인한 펜데믹,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과 관련된 역사소설을 쓰고 있어요. 경제서적과 달리 소설은 허풍을 떨어도 되는 재미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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