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신규 원전 건설 백지화와 노후 원전 수명 연장 금지 등을 포함한 에너지전환 정책을 추진하면서 현재 건설이 한창 진행 중인 신고리 5·6호기는 ‘국내 마지막 원전’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에 따라 국내 신규 원전 건설 물량이 전무한 상황에서 원자력계는 해외 원전 수출에 사활을 걸고 있다.

세계원자력협회(WNA; World Nuclear Association)에 따르면 2030년까지 계획된 신규 원전은 총 23개국에서 153기에 달한다. 이 중 중국이 41기로 가장 많으며, 러시아가 25기, 인도가 15기로 뒤를 잇는다. ▲아시아-오세아니아 ▲동유럽 ▲북미 ▲서유럽 ▲아프리카-중동 ▲남미 등으로 구분해 살펴보면, 아시아-오세아니아가 72기, 동유럽이 42기, 북미 16기, 서유럽 12기, 아프리카-중동 9기, 남미 2기이다.

원자력계는 중국, 러시아, 일본 등 원전 건설 기술을 보유한 국가를 제외한 60여기를 두고 수주전을 벌일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한국은 특히 사우디아라비아(사우디), 영국, 체코 등에 원전을 수출하기 위해 적극 나서고 있다.

사우디는 1400MW 규모의 원전 2기를 건설하는 사업을 추진 중이며, 2030년까지 대형원전 16기를 건설할 계획이다. 현재 추진 중인 1400MW급 원전 2기에 대해서는 우리나라의 한국전력을 비롯해 러시아(로사톰), 프랑스(아레바), 중국(CGN), 미국(웨스팅하우스) 등이 수주전에 뛰어들었다. 사우디는 당초 5월말까지 숏리스트 2~3곳을 선정할 예정이었지만, 발표가 늦어지고 있다.

최근 무함마드 빈살만 사우디 왕세자가 이란 핵협정에 불만을 표시하며, 핵농축·재처리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천명한 직후 미국은 이란핵협정(JCPOA·포괄적공동행동계획)에서 탈퇴했다. 수주전을 벌이고 있는 5개국 중 러시아와 중국은 사우디의 핵농축·재처리를 동의할 것으로 전망된다.

또 미국 원자력 협정이라는 장애물을 넘어야 한다. 미국 원자력법 123조에 따르면 미국의 원자력 기술을 제공받는 국가가 우라늄 농축과 사용후핵연료를 재처리하려면 미국 정부와 의회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우리나라의 수출형 원전인 ‘APR-1400’은 미국 웨스팅하우스의 ‘AP 1000’을 기초로 개발됐다.

이 때문에 사우디 원전수출은 셈법이 복잡하다. 사우디에 핵농축·재처리가 불가하다는 사실을 설득하는 과정과 미국과 협력해 원자력협정 체결 또는 공동 진출 방안 등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원자력계 전문가들은 장기적으로 2030년까지 건설을 추진하고 있는 원전 14기에 대해서는 미국을 설득해 다국공동농축체계를 추진해야 한다고 제언한다. ‘우렌코’(Urenco)와 ‘유로디프’(Eurodif) 등 다국공동의 우라늄농축회사들이 미국, 프랑스에 우라늄농축시설을 건설하는 이른바 ‘Black Box’ 방법만을 허용하는 접근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영국의 경우 6개 부지에 원전 13기를 건설해 총 18GW의 전력설비를 확보할 계획이다. 프랑스전력공사(EDF)와 중국 광동핵전집단공사(CGN)는 힌클리포인트(Hinkley Point) 2기, 시즈웰(Sizewell) 2기, 브래드웰(Bradwell) 2기를, 뉴제너레이션사(NuGen)는 무어사이드(Moorside) 3기를, 호라이즌사(Horizon)는 윌파(Wylfa) 2기와 올드베리(Oldbury) 2기를 건설할 예정이다.

이중 한전이 지난해 12월 무어사이드 원전 사업자인 일본 도시바 지분인수를 위한 우선협상 대상자로 선정됐다. 무어사이드 원전사업은 사업자가 건설비를 조달하고 완공 후 전기를 판매해 투자비를 회수하는 방식으로, 컨소시엄 구성을 통한 자금 조달 능력이 성패를 가를 것으로 보인다.

체코는 2015년 국가에너지정책(SEP)에서 두코바니(Dukovany)와 테멜린(Temelin) 지역에 각각 원전 1기를 조속히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체코는 원전 수출 산업을 육성하려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러시아는 오일머니를 바탕으로 재정지원에 힘쓰고 있고, 사용후핵연료를 회수하는 조건으로 수출에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이에 따라 체코는 러시아 원전을 수입하되 핵심부품 공급자 지위를 확보하려는 전략을 취할 것으로 예상된다.

황일순 서울대 교수는 “체코를 유럽 수출을 위한 교두보로 삼는 전략이 바람직하다”며 “우리의 유럽형 원전을 체코에 수출하는 한편 일부 주요 부품을 체코에 기술이전해 유럽 수출 시 공급망(Supply Chain)으로 활용하는 윈윈(Win-Win)전략을 추진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원자력계는 미국, 캐나다, 필리핀 등의 원전시장도 문을 두드려 볼 만한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미국은 셰일가스 생산이 늘어나면서 발전단가가 급락해 가동원전이 경쟁력을 잃고 있다. 이에 현재 가동 중인 2세대 원전 중 1/3가량이 조기에 문을 닫을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하지만 미국 경제가 호전되고, 셰일가스는 지진 유발, 지하수 오염, 메탄·이산화탄소 등 가스 발생 문제로 생산단가가 증가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원자력계 전문가는 “지난 5월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NRC) 설계 인증 심사 6단계 중 가장 중요한 고비인 4단계를 통과해 이르면 올해 안으로 늦어도 내년 상반기까지 인증 획득이 가능할 것”이라며 “만약 셰일가스의 경쟁력이 떨어진다면 한국 원전의 경쟁력이 회복되므로, 장기적으로 미국 시장을 노려볼 수 있다”고 전망했다.

또 캐나다는 우라늄이 풍부하므로, 향후 송전망이 없는 극지방에 소형 원전 건설을 추진할 가능성이 높다. 캐나다 원자력연구원이 세계 소형모듈원전 시험장을 제공해 기술습득을 추진하고 있다. 이에 따라 캐나다에 SMART 원전 등 국내 소형원전수출 추진도 노려 볼만하다.

지난 3일 2박3일 일정으로 공식 방한한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은 원전 도입을 타진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공식일정이 끝난 다음 날인 지난 6일 공식 수행원이었던 알폰소 쿠시(Alfonso Cusi) 필리핀 에너지부 장관 등 에너지부 대표단이 고리 2호기를 찾은 점도 고무적이다. 전문가들은 필리핀의 바탄원전은 재가동하기에는 경제성이 희박하다고 진단했다.

원자력계 전문가는 “필리핀은 소형모듈원전을 희망하므로, 소형원전수출을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를 토대로 향후 인도네시아 시장을 개척할 수 있다”며 “원자력계가 원전 수출로 활로를 모색하고 있는 만큼, 가능성이 있다면 다방면으로 원전수출을 추진해볼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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