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재인 가온전선 대표
윤재인 가온전선 대표

1940년 5월 13일, 제2차 세계대전에서 군사적으로 열세에 있던 독일군이 최강의 육군 전력을 보유한 프랑스 연합군의 방어선을 함락시키는 대사건이 벌어졌다. 당시 프랑스는 자국의 군사력만으로도 독일이 넘볼 수 없었던 막강한 상대였을 뿐만 아니라 영국, 네덜란드, 벨기에까지 연합군으로 가세한 상태였다. 독불 국경지대에는 아르덴느 삼림이라는 거대한 천혜의 장벽이 있었고 나머지 지역에는 프랑스에서 엄청난 국력을 투입하여 마지노선(Maginot Line)이라는 난공불락의 요새를 건설하였다. 10년 동안이나 건설한 이 방어선은 이중철골과 콘크리트로 6미터 지름의 벽을 만들어서 탱크의 공격에도 끄떡이 없었고, 지하로 거대한 터널을 뚫어 식량이나 무기를 조달할 수 있었다. 곳곳에 이중 삼중으로 설치한 벙커는 어떤 보병의 통과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런데 압도적인 전력에 마지노선까지 보유한 프랑스 연합군은 정작 독일의 공격에 손도 써보지 못하고 패배하고 말았다. 연합군은 덩케르크에서 포위되어 섬멸당할 위기에까지 몰렸으나 구사일생으로 철수하는 뼈아픈 대패를 경험하였다. 전력의 열세를 극복하고 독일군이 단기간에 대승리하게 된 비결은 무엇일까? 대승으로 이끈 독일 전격전을 가능하게 한 비밀병기는 바로 ‘무전기’였다. 프랑스군은 탱크 바깥에 있는 지휘부만 무전기를 가지고 있었다. 탱크가 보병들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지휘계통이 탱크의 이동과 무력을 모두 지휘하는 방식이었다. 반면 독일군은 탱크 내에서도 무전기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미리 정해진 전략대로만 탱크와 보병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전략을 조율하면서 움직이는 실시간 조율방식으로 움직였다. 프랑스 연합군이 수뇌부에서 작전을 지시할 때쯤이면 이미 독일군은 다른 패턴으로 움직였기 때문에 연합군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급변하는 환경 가운데서 영원한 승자도 패자도 없이 경쟁하는 것이 오늘날 기업 생태계이다. 한때 견고한 마지노선 같은 강점을 믿고 안주하다가 어느 순간 급부상하는 새로운 경쟁자에 뒤져서 몰락하거나 쇠퇴한 기업이 적지 않다. 현대 기업은 과거의 자산에 지나치게 얽매여 있지는 않은지 경각심을 가지고 돌아봐야 할 것이다.

아프리카 몇 개국의 전력청을 방문하는 기회가 있었다. 이들 국가는 전력 수요가 증가하고 있어 성장 잠재력은 있으나 제조업이 낙후되고 산업 인프라는 열악한 실정이다. 아직 전력화율이 30%에 지나지 않는 국가도 있었다. 미팅을 위해 회의실로 올라가야 하는데 정전이 발생하여 계단으로 올라가야 하는 상황도 경험하였다. 이처럼 도심 한복판의 전기 사정도 열악한 환경이지만 한 가지 잘 갖추어진 시스템이 있었다. 현지 국민 대부분이 스마트폰 앱을 통해 전기료를 납부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에도 전기료를 납부하는 앱이 있지만 아직 일부만 활용하고 있고 다른 결제수단이 주로 이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 인천시와 한전컨소시엄이 ‘스마트그리드 확산사업’의 최종 완성 단계로 사용자의 휴대폰을 통해 언제 어디서든 실시간으로 에너지 사용정보를 분석하여 제공하는 서비스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아프리카 현지인에게는 앱을 통해 전기 사용량을 관리하고 전기요금을 납부하는 것이 생활화되어 있었다. 전력 인프라는 낙후되었지만 최종 사용자 단계에서는 몇 단계를 건너뛴 선진적인 플랫폼을 활용하고 있는 것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들을 미개발국가라고 여기고 저렴한 제품을 공급하겠다는 단순한 발상으로 접근할 경우 큰코다칠 수 있다는 경각심이 들었다. 현지 고객에게 신뢰받는 파트너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선진적인 솔루션을 제공해야 할 것이다.

이제 단순 하드웨어 공급 방식으로는 고객에게 어필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전선 제조업은 전력∙통신망 구축용 산업재를 생산하는 전형적인 굴뚝산업이다. 고객 사용 환경에 적합한 전선을 계속 개발해왔지만 단품 공급이라는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기술이 고도화되고 복잡성이 증가하면서 시스템을 공급하는 새로운 방식을 시도하고 있다. 당사는 건물 내 시공 편의성을 높이는 케이블을 개발하면서 접속과 분기 모듈까지 영역을 확장하였다. 또한 사용자 대상으로 케이블과 모듈을 설치하는 방법을 교육하는 프로그램도 지원하는 중이다.

또 최근 한 전선업체에서 사물인터넷(IoT)을 활용한 재고 관리 시스템을 개발하였다. 제품과 자재에 통신 센서를 부착해 핸드폰으로 위치와 재고 수량 등을 실시간으로 파악하는 시스템이다. 이를 통해 제품 출하 시간이 단축되고 운송 중 도난 사고에도 대처할 수 있어 전선업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에도 사업확대가 기대된다고 한다. 하드웨어 제조업인 전선업체가 4차 산업혁명 기반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선진적인 시스템을 개발한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앞으로 전선업체도 소프트웨어 솔루션을 공급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하여 다른 전선업체에도 분발을 촉구하는 사건이다.

최근 남북 화해 기류에 따라 남북경협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남북경협이 본격화되면 북한 송배전망 현대화 사업도 진행될 가능성이 크다. 전선업계가 이 기회를 잘 활용하기 위해서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마음으로 솔루션을 개발하여야 할 것이다. 남북 화해 무드와 더불어 다가오는 사업 기회를 전선업계가 면밀하게 준비하여 새로운 성장을 이루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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