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해 마련된 산업재해 보상제도가 현장에서 제대로 작동되지 못하면서 일하다 다친 노동자들이 불이익 없이 산재를 신청할 수 있도록 제도개선이 필요할 것 같다. 국제노동기구(ILO)는 산재를 업무상의 재해나 질병에 국한하지 않고 산업 합리화 등에 의한 새로운 형태의 직업병이나 통근 재해(通勤災害)까지 포함토록 규정하고 있다. 산재에 해당되는 범위가 넓기 때문에 작업환경에 관계없이 일하는 사람은 누구나 산재 대상자가 될 수 있다고 보면 된다.

특히 ‘위험의 외주화’ 문제에서 보듯이 위험한 일을 도맡아 하는 하청기업의 경우는 산재에 노출될 빈도가 높다. 지난해 안전보건공단 산하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이 밝힌 자료에 따르면 2015년 기준, 노동자 1만명당 산재로 숨진 노동자의 숫자는 사내하청이 0.39명인 데 반해, 원청은 0.05명으로 사내하청이 8배 높게 나타났다. 반면 전체 재해율은 노동자 100명당 원청이 0.79명인 데 반해 하청은 0.20명으로 오히려 4분의1 수준에 그쳤다. 이 수치가 의미하는 것은 하청기업들이 산재신고를 극도로 꺼리고 있다는 것이다.

2013년 기준 우리나라의 산업재해율은 0.59%로 경제협력개발기구 평균(2.7%)의 4분의 1에도 못 미치지만, 사망자 숫자는 1만명당 0.68명으로 압도적 1위다.

국가인권위원회가 2014년 발표한 ‘산재 위험직종 실태조사’ 보고서를 보면 일터에서 다친 조선·철강·건설플랜트 하청노동자 343명 중 산재 처리가 된 사람은 36명(10.5%)에 그쳤다. 나머지는 회사에서 알아서 처리하거나 개인이 비용을 부담했다.

산업재해 보상제도란 좋은 제도가 있으면서도 맘 놓고 활용하지 못하는 것은 지나치게 처벌 위주로 흐르고 있는 제도 때문이란 목소리가 높다. 많은 중소 전기/통신 공사업체들이 공공기관 또는 대형 건설사의 하청업체로 계약을 맺고 일을 한다.

이런 구조 때문에 하청기업이 원청업체·발주기관의 눈치를 보지 않고 산재를 신청할 경우 받는 불이익은 불 보듯 뻔하다. 그래서 현장에서 일하다 사고가 나도 쉬쉬하며, 회사가 또는 개인이 치료비를 감당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됐다. 대기업은 하청기업이 산재신고를 많이 하면 입찰점수 감점 우려 때문에 산재신고를 가로막고 있고, 공공기관은 감독자 연대책임 때문에 산재신고에 미온적인데 이런 불합리한 제도도 뜯어 고칠 필요가 있다.

지난해 10월 19일 산업안전보건법이 개정·시행되면서 산재를 은폐했을 경우 1년 이하의 징역이나 1000만원 이하의 벌금형 등 형사처벌을 받게 된다. 발주처와 원청, 근로자 사이에서 치이며 절대적인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전기공사업체들이 이제는 잠재적인 범죄자로 몰리게 됐다.

정부가 산재신고를 강화할 수 있게 법을 개정한 만큼 현장에서도 정부의 법 개정 취지에 부합할 수 있게 처벌중심에서 사고예방 중심으로 인식을 전환할 필요가 있다. 더 나아가 산재신고를 한 기업을 벌줄 게 아니라 산재를 은폐한 기업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채찍을 들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반대로 산재신고를 제대로 해 근로자를 감싸안은 기업에 대해서는 인센티브도 필요하다. 산재 없는 일터를 만들겠다는 구호 때문에 숫자가 왜곡되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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