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광훈 녹색연합 전문위원
석광훈 녹색연합 전문위원

지난해 유행어처럼 매일 언론의 지면을 채우던 ‘4차 산업혁명’ 논란은 어느새 크게 줄어들었다. 과거 이명박정부에서 대대적으로 홍보하던 ‘스마트그리드’가 잊혀진 상황을 보면 새삼스럽지는 않다. 그러나 해외에선 둘 다 결코 지나가는 유행이 아니며 에너지산업의 판도를 크게 바꾸고 있다. 전기차만큼 요란하지는 않지만 스마트미터, 스마트센서(occupancy sensor) 기술의 약진과 전기, 가스, 통신 시장의 융복합이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

이웃 일본에서는 ‘스마트그리드’, ‘4차 산업혁명’이라는 개념을 거의 사용하지 않지만, 말뿐인 우리보다 10년 이상 앞서나간 상황이고 이제 전기, 가스, 통신은 결합서비스상품이 되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해외에선 급진전되는 혁신이 국내 에너지산업에선 막히는 걸까. 일단 모두가 야단스럽게 유행어처럼 사용한다는 측면에서 겉으로 볼 때 이를 반대하는 이들은 없다. 하지만 한꺼풀 벗겨보면 이러한 혁신은 현재의 에너지시장제도 및 이해당사자들과 근본적으로 상충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난 2010년 한전이 본격적으로 스마트미터 보급사업을 한 지 8년이 되었지만, 보급률은 20%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이미 해외에서 상용화된 지 오래된 기술임에도 보급이 지지부진한 이유 중 하나는 한전산업개발 등 5000여명의 계량기 검침원들과 직접적인 이해상충관계에 있다. 마치 19세기 말 에디슨의 백열전구 가로등과 기존 가스등의 운명적 대립이 재연되는 상황이다.

한전은 사실상 평생고용을 책임져야 하는 공기업이기에 더욱더 어려운 문제다. 이 때문에 애초부터 한전은 스마트그리드 사업과 구조적인 딜레마를 안고 있었던 것이다. 한전의 딜레마는 스마트미터에서 끝나지 않는다.

한전의 핵심 경쟁력은 원전과 석탄화력을 단기간 저렴하게 건설하고, 극단적인 주야간 요금차별을 통해 세계 최고수준의 부하율을 유지해, 저렴한 전력으로 국내 제조업을 지원한다는 데에 있다. 하지만 후쿠시마 사고, 미세먼지로 원전과 석탄에 대한 사회적 거부감이 커진 상황이고, 극단적 주야간 차별요금제 역시 특정업종을 제외하고 더 이상 심야조업이 생산적이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은 경제구조로 전환되면서 현실과의 괴리가 커진 상황이다.

가스산업은 어떠한가. 신재생에너지가 세계적으로 약진하고 있지만, 아직 기술적 약점으로 당분간은 유연성이 뛰어난 가스복합화력과 공존할 수밖에 없고, 국제에너지기구(IEA)도 향후 30년간 가스복합과 신재생이 세계 전력시장을 주도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국내의 고립된 전력망을 감안할 때 신재생에너지 확대를 위해선 가스복합의 확충은 불가피하다. 하지만 국내에서 가스복합은 연료가격문제로 한전이 가장 기피하는 기술이다. 물론 LNG형태로 수입하기에 가스도입가격 자체도 높은 편이지만, 국내 전력부문이 도시가스가격을 보조하는 이른바 교차보조가 제도화되어 시장가격보다 훨씬 높은 가격이 책정되기 때문이다.

이런 교차보조는 왜 생겼을까. 지난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국내 연탄가스중독 사망자가 매년 1500명에 이르는 등 국내 주택난방 문제는 심각한 사회문제였다. 정부가 취한 정책은 가스공사를 통해 도시가스가격의 상당부분을 한전에 전가시켜 난방부문연료를 연탄에서 도시가스로 신속하게 전환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4반세기만에 한국의 도시가스 보급률은 80%를 넘어섰고 이는 세계3위 수준이다. 또한 국내 도시가스가격은 PNG를 사용하는 유럽은 물론 천연가스 수출국인 영국이나 네덜란드보다도 약 25% 저렴하다. 덕분에 2000년대 들어서 연탄가스중독 사망자는 연간 10~20명으로 대폭 줄어들었고 이는 크나큰 정책성과다.

그러나 반대로 가스복합발전은 더 큰 가격부담을 떠안으면서, 한전이 가장 기피해야 할 전원이 되었다. 한전이 가스복합 가동을 최소화하기 위해 늘린 석탄화력은 미세먼지와 온실가스배출의 주범이 되어 우리 경제와 환경에 큰 문제로 부각된 상황이다. 과거 난방부문 연료전환이 요구되었다면, 이제는 전력부문 연료전환이 요구되는 상황이다.

스마트그리드, 4차 산업혁명, 온실가스, 미세먼지, 신재생에너지 등 모든 이슈들이 현재의 한전과 가스공사로 대표되는 국내 에너지산업구조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이는 이들 공기업 경영진의 의도나 능력과 무관한 일이며, 오히려 과거의 놀라운 정책적 성공이 현재의 개선을 구조적으로 막고 있다는 점이 맹점이다. 이러한 상충관계를 어떻게 해소할지는 당장 답을 찾기 어려운 문제이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과 같은 겉핥기식 ‘4차 산업혁명’ 논의를 넘어서려면 이 상충관계를 정확히 이해하는 데에서 실질적인 혁신의 출발점을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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