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레일 부산경남본부 전기처장 반극동
코레일 부산경남본부 전기처장 반극동

내 철도인생은 감사와 행복열차였다.

“성명 반극동 전기기원시보에 임함, 영주지방철도청 근무를 명함. 1982. 2. 26. 철도청장” 졸업식 날 이 임용장을 받고 청량리역에서 영주행 열차를 탄 것이 나의 첫 직장생활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철도가 마지막 직장이 돼 이달로 35년 10개월이 됐다. 엄청 긴 세월인 듯한데 되돌아보니 짧은 여행이었다. 공교롭게도 내가 철도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데 지난해 11월에 신규사원 605명이 발령을 받았다. 마침 지난해 5월에 35년 직장생활을 마감하는 의미에서 펴낸 내 책이 있어 출판사의 협조로 한 권씩 전해 주었다. 추가로 인쇄한 책이 다 팔리지 않고 남아 있어 그 재고를 줄여주니 마음이 한결 홀가분했다.

스무 살 시절 모 라디오 프로그램에 엽서사연이 당첨된 일이 있다. ‘여행은 인생이다.’라는 내용인데 지금 생각해 보니 ‘인생이 여행이었다.’ 직장생활 36년도 되돌아보니 즐거운 여행이었다. 낯선 곳의 호기심과 두려움을 함께 느꼈던 여행은 늘 설레는 기분으로 떠났다. 새로운 사람과 익숙지 않은 지역을 만나고 배웠던 여행. 직장도 그 연속이 아니었던가? 비행기, 기차, 자동차를 탔던 순간들, 늘 목적지를 향해 갔고 그곳은 잠시 안락했다. 그러나 거긴 임시 거처일 뿐 최종 목적지는 항상 집으로 돌아오는 것. 내 직장생활 마지막 길도 출발했던 집으로 오는 길이다. 처음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잃어버린 초심을 회복하는 길이다.

많은 사람들은 지난날을 늘 후회하지만 난 철도 36년은 후회하지 않는다. 현재의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지난 36년간의 결과다. 다시 되돌아가면 지겹고 흥미 없지 않는가? 차라리 지난날 하루하루를 알차게 보내려고 애쓴 내 자신에게 박수를 쳐 본다. 다만 뜻하지 않은 의도로 내 옆의 사람들이 상처를 입었다면 용서를 구하고 싶다. 그 용서는 상처자의 이해로 마무리 짓고 싶다. 함께 근무하는 직원이 물었다. “아직 5개월이 남았는데 왜 나가려고 합니까?” 그 대답을 했다. “그건 말이야, 연애할 때 상대에게 퇴짜 맞을 기미가 있을 때 내가 먼저 차 버리면 되는 것과 같아”라고. 나의 자존심, 잃어버린 나를 찾는 것이다.

지난해 9월엔 은퇴예정자 교육을 다녀왔더니 다음 퇴직 차례인 동료가 물었다. “반 처장, 그 교육 유익했어? 뭐 배울 게 있었어.” 그 물음에 내가 답했다. “응, 마지막 강사가 이런 이야기를 하더군. ‘여기 계신 분들은 정말 행복하신 분들입니다. 우리나라 직장인의 은퇴나이가 평균 52~53세쯤인데 그보다 5~6여년이나 더 일하고 있으니 그것 말고 또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자녀교육도 다 시켰고, 빠른 분은 혼사까지 치르시고 연금과 퇴직금까지 있으시니 재무관리는 더 이상 알려드릴 것이 없어요. 지금 떠나도 행복하시니 이제 여러분들은 자신감만 가지시면 됩니다. 자신감!’ 그 말이 이번 교육에서 제일 큰 배움이었지.”

사무실 책장에서 우연히 발견한 책 ‘법정스님의 아름다운 마무리’를 보고 기뻐했다. 예전에 한번 읽은 적이 있는 책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처음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 잃어버린 초심을 회복하는 것. 아름다운 마무리는 근원적 물음 ‘나는 누군가?’ 하고 묻는 것. 아름다운 마무리는 내려놓음이고 비움이다. 채움만을 위해 달려온 생각을 버리고 비움에 다가가는 것. 그 비움이 가져다주는 충만으로 자신을 채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살아온 날들에 대한 찬사를 보내는 것. 타인의 상처를 치유하고 잃어버렸던 나를 찾는 것. 수많은 의존과 타성적인 관계에서 벗어나 홀로 서는 것. 아름다운 마무리는 용서이고, 이해이고, 자비이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 또 시작과 끝은 항상 한 묶음이다. 부산역이 경부선 종착역이자 출발역인 것처럼 철도 36년 종착은 다시 시작하는 서던에이지의 시점이다. 은퇴 단어가 retire이듯 자동차에 타이어를 바꾸면 다시 잘 달리 수 있다. 예전에 본 ‘철도원’ 영화대사가 생각난다. “죽은 딸도 깃발을 흔들면서 맞이하는군요. 어쩔 수 없잖아요. 내가 깃발을 안 흔들면 기차가 제때 안 가는 걸”, “우리 아버지 말씀만 믿고 살았지. 끊임없이 이어진 레일처럼. 하루도 빠짐없이 달리는 기차처럼 씩씩하게 살아야 한다고. 그리고 철도원으로서 사명을 다 하려고 했어. 후회는 없다.” 이 대사처럼 36년간 직장생활을 마무리하면서 후회는 없다. 끊임없이 이어진 레일 위를 달렸던 내 철도인생은 감사와 행복열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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