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판별 명령 불구 시험의뢰 기관 없어 ‘지지부진’
정부 공인시험기관서 제품불량 분석…‘代案’될 수도

단락·누전·화재 등 전선에서 각종 사고가 발생해도 원인을 객관적으로 판정해줄 공인기관이 없어 사태를 더욱 꼬이게 만들고 있다.

시공업체와 전선 납품업체 간 분쟁·소송이 벌어져도 제품 불량 여부를 중립적이고 명쾌하게 판별해줄 수 있는 기구나 시스템이 없다보니 사고 뒤처리가 지연되거나 피해가 확산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최근 전기공사업체와 기자재 유통업체가 단락사고가 발생한 옥내용 절연전선(HIV)의 불량 여부를 두고 법정공방을 벌이는 과정에서 이 같은 문제가 쟁점으로 부각됐다. ▶본지 3333호 8면 보도

현장에 시공한 기기배선용단심비닐절연전선(HIV)에서 단락사고가 지속적으로 발생했고, 이에 대한 책임을 가리는 과정에서 전선 불량·시공 하자 여부를 판정해줄 공인시험기관이 없어 사건 해결이 지지부진해진 사례다.

법원에서 전문가·기관 감정을 통해 전선 불량 여부를 판별하라는 명령이 내려왔지만, 한국기계전기전자시험연구원, 한국화학융합시험연구원 등 공인시험기관들은 관련 시험 의뢰를 거부했다. 소송 당사자들은 이에 대해 뾰족한 대안을 찾지 못하고 있다.

해당 전기공사업체는 사건발생 초기 단순 시공하자로 판단, 무료 교체 시공을 해줬다. 그러나 점차 사고 현장 숫자가 늘어나면서 교체시공에 투입된 비용만 1억원 가까이 늘어난 상태다.

현재 현장에서 문제가 발생할 경우 구조적으로 시공업체에 먼저 책임이 돌아간다. 따라서 기자재 납품업체는 사건이 이처럼 확대되는 과정에서도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고 있다.

결국 직접적인 손실을 떠안고 있는 전기공사업체만 답답한 상황이다.

이에 대해 해당 유통업체는 수차례에 걸친 기자의 취재 요청에도 일절 응하지 않고 있다.

해당 전기공사업체 관계자는 “타사에서 구매한 전선에서는 하자가 발생하지 않고 있다. 정황상 불량전선으로 의심되지만, 시험·분석을 통해 원인을 입증할 수 있는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있다”며 “시험기관들은 내부 규정상 소송과 관련된 시험을 하지 않는다며 의뢰를 거절하고 있다. KS시험이나 시판품 불량 조사 의뢰 등은 수행하면서도, 유독 소송과 관련된 의뢰는 받지 않는 이중적인 태도는 이들이 시행하는 시험의 신뢰성을 의심케 하는 행위”라고 질타했다.

경기도 고양시의 한 아파트에서 일어난 저독성난연가교폴리올레핀절연전선(HFIX) 대규모 누전 사건도 이와 비슷한 사례다. ▶본지 3304, 3306, 3308, 3310호 시리즈 보도

최근 고양시 한 아파트 단지의 수백여 가구 입주민들이 HFIX 누전으로 인한 불편과 사고 위협을 겪어, 전선에 대한 조사와 수거, 교체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해당 전선을 무료로 교체해주고 있는 현장 시공사는 피해액수가 3억원을 넘기며 문제가 일파만파 번지자 발주사, 전선 제조·유통사 등을 상대로 공동 대응을 요청하고 있지만, 이들 대부분은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고양시 현장에서도 전선이 불량인지 아닌지 여부가 쟁점으로 떠올랐지만, 이를 객관적으로 검증해줄 장치가 없어 사건 해결은 기약 없이 미뤄지고 있다.

이에 따라 전기공사업계에서는 전선 등 전기자재로 인한 단락, 누전, 화재 등의 사고가 발생할 경우, 원인을 공정하고 투명하게 조사·분석할 수 있는 시험기관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커지고 있다.

특히 제조물의 결함만 입증하면 제조사가 배상책임을 져야하는 ‘제조물책임법(PL법)’이 2002년 시행에 들어갔음에도 제품결함을 시험할 수 있는 시험기관이 없다는 것은 시험기관뿐 아니라 소관 정부부처인 산업통상자원부, 국가기술표준원의 무능을 입증한다는 비판까지 나오고 있다.

이와 관련 한 공인시험기관 관계자는 “공인시험을 받으려면 시험목적을 명시해야하고, 이에 따라 성적서를 사용해야 한다”며 “하지만 본래 목적과 다른 용도로 시험성적서를 활용하고, 이로 인해 문제가 일어난 사례가 있어 소송 등과 관련된 목적으로는 사용할 수 없다는 규정을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시험기관 관계자는 “PL법이 시행되고 이에 따른 시험사업을 검토해봤지만, 민감한 사안이 많아 무산됐다”며 “현재로서는 소송과 관련된 시험의뢰는 화재분석·조사 연구·시험사업을 수행하는 민간 시험 업체에 의뢰하는 방법밖에 없을 것”이라고 전했다.

전선업체들도 이 같은 상황에 답답해하고 있다.

전선업계 한 관계자는 “시공 하자인지, 전선 불량인지 명확히 판정해줄 시험기관이 없어 제조사들도 난감한 경우가 많다”며 “시공 하자가 분명한 사고임에도 브랜드 이미지를 생각해 울며 겨자먹기로 책임을 떠안는 상황도 분명 있다. 차라리 정부가 공인하는 시험기관에서 제품 불량 여부를 공정하게 분석해 제공한다면, 분쟁이 길어지면서 발생할 소비자 피해와 시간, 비용을 절약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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