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극동 코레일 부산경남본부 전기처장
반극동 코레일 부산경남본부 전기처장

이 가을엔 기차를 타고 책을 읽자

1980년 3월 철도대학에 들어오면서 철도와의 인연을 맺었다. 그 해 가을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부산여행을 갔다. 밤 11시쯤 출발하여 새벽 5시에 부산역을 도착하는 야간열차였는데 입석이었다. 객실 맨 뒷자리에는 한 사람 정도 서서 갈 수 있는 공간이 있었는데 거기에 앉으면 객차 방열판 턱에 쪼그려 앉아 갈 수도 있었다. 그 곳에 앉아갈 요량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 한 아가씨가 내 옆자리에 와서 나란히 서서 가게 되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에 가슴만 콩닥거리고 있었는데, 그 아가씨가 책을 펴서 읽기 시작했다. 무슨 책인지 모르지만 책장을 너무 느리게 넘겨 연민의 정까지 느껴져 한마디 참견했다. “무슨 책인데 그렇게 ‘안광(眼光)이 지배(紙背)를 철(徹)함’ 식인가요?” 이 말에 아가씨는 “'박이부정(博而不精)이 그 통폐(通弊)요, 나무를 보고 숲을 보지 못함이 또한 그 약점이다'식이여요"라고 대답했다. 정독(精讀)을 설명하는 그 말 한마디에 뭔가 통하면서 서로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 문구는 고등학교 2학년 국어교과서 중 양주동 박사의 ‘면학의 서’란 수필에 나오는 것이다. 그걸 정확하게 외우고 있는 여인이 갑자기 예뻐 보일 수밖에 없었다. 긴 밤 기차여행을 아가씨와 책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부산에 도착했고, 그날 이후 우리는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그것이 2년 정도 사귀었던 나의 첫 사랑이었다. 공교롭게도 아내를 만날 때에도 책 읽는 모습에 반해서 만났다. 당시 전기통신장(현 선임전기장)이란 보직을 처음 받고 부임한 곳은 태백선 증산전기분소(현 민둥산역)였다. 어느 날 관내 중 예미역에 갔었는데 마침 태백선 CTC공사가 한 참 진행 중이었다. 그 공사 사무실에 들렀더니 사무실 모퉁이에 앉아 있는 예쁜 아가씨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을 읽고 있었다. 명상록은 학창시절 배운 글 중 가장 어려웠고 이해도 잘되지 않았었다. 그런 글을 읽고 있는 모습에 반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데이트를 신청했고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만난 지 3개월 만에 결혼까지 했다.

책 이야기 하려다 옛날 나의 첫사랑과 아내를 만난 이야기까지 했지만 나도 책 읽기를 좋아하는 편이다. 내가 좋아하는 책은 약간 모험적 여행기와 자서전적인 수필이다. 상대방의 삶을 엿 보면서 나의 삶과 비교해 보는 재미가 있다. 또 이해인 수녀의 감성 있고 신앙 깊은 기도 시도 좋아하는 편이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와 이민규 박사의 ‘끌리는 사람은 1%가 다르다’를 읽고 상대를 이해하는 노하우를 익혔다. 지난 5월 ‘경부선 종착역 부산은 따뜻하다’란 책을 내고 나서는 다른 사람이 쓴 책을 읽으려 노력하고 있다. 상대 책을 읽어야 내 책도 남이 읽어 주니깐.

작년 1월부터 철도에서 책 읽는 열차도서관인 ‘독서바람열차’를 경의중앙선전철에 도입하여 승객들의 좋은 호응을 얻고 있다. 열차 1량을 미니도서관으로 리모델링한 후 도서 1000 여 권과 전자책 4대를 비치하여 승객 누구나 책을 읽을 수 있는 독서 콘텐츠를 제공하고 있다. 문산역에서 용문역까지 124km거리의 긴 구간에 지루함을 달래기도 좋다. 열차 외부는 독서의 가치를 알리는 문구와 사진으로 꾸며 한 눈에 독서바람 열차임을 알고 책 읽기 홍보를 톡톡히 하고 있다. 이벤트로 작가와의 만남, 열차 내 독서토론, 음악과 함께하는 북콘서트, 자녀와 함께 떠나는 독서기차 여행, 신간 도서 소개, 이달의 읽을 만한 책 증정 등 다양한 콘텐츠도 운영되고 있다.

이런 정기적으로 운행하는 독서바람열차 외에 열차를 통째로 빌려 운행하는 교육용 전세열차 e-트레인이 있다. 이 열차는 독서와 교육관련 행사, 문화유산 답사여행용으로 운행된다. 각 학교 및 회사 등에서 단체로 희망하는 지역까지 열차로 이동하면서 다양한 문화행사를 병행 할 수 있는 이벤트 전세열차다. 독서의 계절인 가을이 되었다. 이 가을에 책을 읽기 위해서라도 독서바람열차를 타 보자. 특히 젊은이들은 야간열차를 타보자. 필자의 젊은 시절처럼 첫 사랑의 여인을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기차와 독서는 이 가을에 딱 맞는 융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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