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규제완화・경제성 논리・안전 불감증’으로 규제 느슨
친환경 안전 전선 도입 위해선 강력한 제도적 뒷받침 필요

“규제완화가 능사는 아니다. 꼭 필요한 규제는 미덕이다.”

전문가들은 우리나라가 진정한 전선강국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제도적인 뒷받침이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불법·불량 행위를 근절하고, 환경 친화적이며 안전한 전선을 적극 도입할 수 있도록 ‘착한 규제’를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유럽이나 미국, 호주 등 선진국의 경우 지속적으로 안전과 환경, 품질 관련 규제를 강화하고 있는 추세다. 반면 국내 전선시장은 규제완화와 경제성 논리, 안전 불감증 등에 묻혀 점차 퇴보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전선업계 전문가들은 이제라도 이러한 흐름을 되돌려야 한다고 지적한다. 전선 관련 법제와 규격을 강화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것이다.

유럽은 건축자재규정(CPR)을 도입, 전선을 비롯한 각종 건축자재의 안전성을 강화하고, 북미지역은 케이블로 인한 2차 화재피해가 나지 않도록 고난연 제품을 사용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이처럼 국민의 안전, 환경과 관련된 착한 규제는 강화하는 방향으로 전환할 것을 주문한다.

박상순 넥상스 코리아 이사는 “유럽의 경우 화재안전에 대한 규제가 매우 강하다. 화재가 발생할 경우 케이블을 비롯한 건축자재로 2차 피해가 나는 것을 예방하고, 화재진압·대피가 용이하도록 CPR을 통해 안전을 담보하고 있다”며 “뒤셀도르프 공항 화재나 최근의 런던 화재 등 여러 뼈아픈 경험을 교훈삼은 결과다. 우리나라도 사고가 발생한 후에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식의 대응 말고 안전성을 높인 제품을 도입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뒷받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양곤 LS전선 팀장은 “유럽이 CPR을 통해 전력·제어·통신용 제품을 구분해 화재안전성능을 만족하도록 규정한 것처럼, 미국도 UL인증을 통해 저압뿐 아니라 고압케이블의 품질과 안전성을 검증하고 있다”며 “일본도 JIS 규격과 PSE제도를 통해 품질·안전을 확보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또한 화재위험성이 높고, 인명·재산피해가 큰 시설물은 난연·내화등급이 높은 고난연·고내화케이블을 적용하고, 화재 시 시야방해나 유독가스배출이 없는 폴리올레핀(PO) 재질을 활용한다”며 “국내는 이에 비해 뒤처져있는 상황으로, 관련 기준을 상향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현재 국내에서 제도적(전기설비기술기준)으로 사용하도록 돼있는 난연케이블은 IEC 60332-3에 따른 3단계(Cat. A~C) 난연성능 시험에서 가장 낮은 수준인 C등급에 불과하다.

내화케이블 기준도 유럽은 950℃, 호주·뉴질랜드는 1050℃에 이르지만, 국내는 소방법 기준에 따라 750℃급에 머물러 있다. 더욱이 내화성능뿐 아니라 화재에 뒤따르는 붕괴(타격특성)에도 강한 내화케이블을 사용하는 선진국과 달리 국내는 타격특성 없는 일반 내화 케이블을 사용하도록 돼 있다.

폴리염화비닐(PVC)에 대한 규제가 강한 것도 국내와 비교된다.

선진국은 환경과 인체에 부정적 영향이 큰 PVC를 퇴출하기 위해 다양한 장치를 마련했지만, 국내는 이와 반대로 PVC전선을 확대하려는 움직임까지 보이고 있다.

박상순 이사는 “PVC전선을 제조할 때 안정제가 들어가는 데, 화재로 전선이 타면 다이옥신이라는 발암물질을 유발한다. 유럽은 뒤셀도르프 공항 화재 당시 15분만에 진화에 성공했지만, 내부에 다이옥신이 가득차 이를 해소하는 데 보다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었던 경험이 있다”며 “이에 따라 케이블뿐 아니라 PVC파이프, 내장재 등 모든 건축자재의 PVC 사용을 규제하고 있다. 특히 PVC 제조 과정에서 배출되는 화학가스도 근로자들에게 악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전선업계는 PO를 대체품으로 활용한다. 국내에서도 PVC를 배제하고 PO 등 대체물질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피력했다.

그리고 PVC 대체물질 도입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시장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여러 장애물을 없애야 한다는 지적이다.

한 중소전선제조사 관계자는 “전선업계에서 PVC를 퇴출하지 못하는 것은 전선업계의 문제가 아니라, 관련 소재 컴파운드 업계에 내재된 문제와 함께 친환경 소재가 PVC 대비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 때문”이라며 “저독성 난연케이블에 대한 ‘녹색제품 구매촉진에 관한 법률’이 마련돼 있지만, 사용의무 대상은 아니다. 유동인구가 많고 밀집하는 다중이용시설물에 대해서는 차별화된 적용이 필요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중소기업 대표는 “최근 LH와 일부 건설업체에서 저독성 난연케이블인 HFIX의 과거 품질이슈를 이유로 PVC전선인 IV를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IV는 입주민들에게 화학가스로 인한 2차사고를 유발할 수 있다”며 “이 같은 사실이 알려진다면 주민들의 반발을 살 수 있다. 주거용 케이블 선정 시에는 인명 피해에 대한 부분이 최우선시돼야 하지만, 국내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고 토로했다.

여전히 근절되지 않고 있는 불법·불량제품 등 전선 품질을 확보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김희남 전선조합 전무는 “비인증, 인증 도용 등 불법전선의 경우 법적으로 처벌이 가능하지만, 동함량이 적거나 품질이 낮은 불량전선은 처벌할 수 없다는 제도적 맹점이 있다. 이를 개선해야 한다”며 “특히 한번이라도 불법·불량행위를 할 경우 끝까지 추적해 적발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 제조사뿐 아니라 불법·불량제품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를 판매하는 유통업체에 대한 처벌규정도 도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저작권자 © 전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