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탁 한밭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조영탁 한밭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세계적인 여행지 그리스에는 널리 알려진 두 개의 섬이 있다. 하나는 우리가 여행 사진에서 자주 보는 하얀 집과 푸른 지붕, 그 환상적인 풍경에 불세출의 작곡가 야니(Yanni)가 명상과 치유의 뉴에이지 선율을 깔아준 섬, ‘산토리니’이다. 또 다른 하나는 이솝 우화에 등장하고 철학자 헤겔과 마르크스가 자주 인용하여 유명세가 더해진 섬 ‘로도스’이다. 전자가 휴양과 여유의 상징으로 자주 인용된다면, 후자는 과장과 허풍의 사례로 자주 등장한다. 그 배경이 된 로도스 섬의 우화는 이렇다.

어떤 허풍쟁이가 로도스 섬을 구경하고 돌아와서 자신이 로도스 섬에서 엄청난 높이뛰기 신기록을 세웠다고 과장하면서 로도스 섬 사람에게 확인해보라고 허풍을 떨었다. 그러자 그 말을 듣고 있던 한 사람이 굳이 거기 가서 물어볼 필요가 없다면서 말했다.

‘여기가 로도스 섬이다. 여기서 뛰어보라!!’(Hic Rhodus, hic saltus !!).

그 말에 허풍쟁이는 더 이상 아무 말을 못하고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는 얘기다. 아무리 좋고 자랑할 만한 주장이라도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현실에 부합하고 실현가능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우화이다. 추상적 당위보다 당장의 현실 개혁을 강조한 헤겔과 마르크스도 바로 그 점을 강조하면서 로도스 섬 우화를 인용했던 것이다.

필자가 뜬금없이 전력 관련 지면에 ‘로도스 섬’ 얘기를 하는 이유는 최근 ‘탈원전의 논쟁’을 보고 이 우화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냉혹한 진영논리가 작동하는 논쟁에서 회색의 양비론이란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 안전장치를 미리 하나 마련해 두자. 필자는 원전 및 석탄발전의 점진적 축소와 가스 발전의 징검다리에 의한 전력패러다임 전환을 제안한 적이 있고 지금도 그 입장에는 변함이 없다. 그 명칭이 어찌되었던 ‘탈원전 논쟁’이 이러한 패러다임 전환과 관련된다는 점에서 최근의 논쟁이 반갑고 또 나름대로 의미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필자가 탈원전 논쟁에서 ‘로도스 섬’ 우화를 연상한 것은 마치 ‘탈원전 논쟁’이 단번에 정리될 수 있을 듯한 다소 과장된 분위기, 원전을 축소하면 정전위기와 요금폭등으로 나라가 결딴날 듯한 허풍의 여론몰이 때문이다. 전자가 주장하는 전력패러다임 전환의 시급성이나 후자가 우려하는 탈원전의 부작용에 대해서는 충분히 공감이 가고 또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 관련부처와 전력업계가 지금의 전력 패러다임을 그대로 고집할 만큼 반개혁적이지 않고, 그렇다고 정전위기나 요금폭등을 불사하고 전력패러다임의 전환을 추진할 만큼 무모하지도 않다.

오히려 쇠뿔을 단김에 빼려는 듯 탈원전을 서두르는 정치적 성급함이나 과거 59%의 비상식적인 원전 확대에 침묵하던 일부 원전 전문가들이 탈원전에서 보이는 이율배반적인 야단법석이 문제다. 오랜 기간 정부의 에너지관련 계획을 어깨 너머로 지켜보면서 필자가 깨달은 교훈이 하나있다. 계획 논의가 과잉 정치화될수록 그 내용은 과소 전문화되고, 특정 전원에 대한 정치적 확신이 커질수록 그 계획의 불확실성은 증가한다는 점이다.

물론 탈원전이든 원전확대든 장기적인 방향성을 놓고 논쟁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고. 그 자체를 탓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최근 탈원전 논쟁은 필요 이상으로 과잉정치화되어 합리적 논의와 객관적 수치검증 없는 노이즈 마케팅으로 비화하고 있다. 탈원전이란 국가의 대계를 논의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논의틀과 방식이 필요하다. 논쟁에도 품격과 수준이 있다는 얘기다.

더구나 현실에서 당장 중요한 것은 수십 년뒤에 있을 법한 탈원전 여부보다 장기적인 전력패러다임의 전환을 위한 개혁 프로그램들이다. 장기적인 전력패러다임의 전환에 중요한 전력요금과 에너지 세제 그리고 전력시장 개혁이 과잉 정치화된 먼 미래의 탈원전 논쟁속에 매몰되어서는 곤란하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경제성, 사회성, 환경성을 조화시키는 한국형 패러다임 전환의 구체적인 프로그램이다. 원전 중심의 프랑스나 탈원전의 독일 얘기가 아니라 전력계통의 섬으로서 대한민국의 얘기, 즉 추상적 당위보다 “여기가 ‘전력의 섬’ 한국이다. 여기서 뛰어 보라!!”는 현실적 요구에 부응하는 일이다.

먼 미래의 추상적인 엔딩 장면을 놓고 벌이는 과장과 허풍은 자제하고 앞으로 어떻게 품격 있고 생산적인 공론화를 할 것인가를 고민할 시점이다. 지금까지 논쟁과정에서 오로지 진영의이익을 위해 세상을 오도하고 필요 이상으로 국민 불안을 유발한 혹세무민(惑世誣民)은 없었는지 스스로 반성하고 격앙된 감정을 추스릴 때다. 탈원전 논쟁에도 ‘로도스 섬의 높이뛰기’가 아닌 ‘산토리니 섬의 여유와 치유’가 필요한 것 같다. 급박한 리듬이면서 불안하지 않고, 웅장한 스케일이면서 시끄럽지 않은 ‘산토리니’의 선율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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