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 손해보다 더 많은 배상액 제공
‘소비자 중심’ 제도로 ‘한 발’ 앞으로

지난해 11월 11일 신상진 자유한국당 의원이 대표 발의한 ‘제조물 책임법 일부개정법률안’이 지난 3월 30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면서 새로운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그동안 꾸준히 지적돼 온 피해자의 입증책임은 경감시키고 손해를 입힌 공급업자의 책임 영역을 확대하는 등 소비자 중심의 제도로 한 발짝 나아갔다는 평가다.

특히 실제 야기한 손해보다 더 많은 배상액을 피해자에게 제공하도록 강제하는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제조물 책임법(PL법)에 적용함으로써 기업의 책임을 강화하는 정책 기조는 지속될것으로 보인다.

◆책임 비중 소비자에서 공급자로 ‘전환’

이번에 통과된 ‘제조물책임법 일부개정법률안’은 지난 4월 1일 공포된 이후 6개월의 유예기간을 뒀지만 계도나 홍보기간이 필요하다는 판단 하에 내년 4월 19일부터 시행된다.

개정안에는 소비자가 ▲제조물이 정상적으로 사용되는 상태에서 손해가 발생할 경우 ▲손해가 제조업자의 실질적인 지배영역에 속한 원인으로부터 초래할 경우 ▲손해가 해당 제조물의 결함 없이는 통상적으로 발생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한 경우 제조물을 공급할 당시 해당 제조물에 결함이 있었고, 그 결함으로 인해 손해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해 소비자의 입증책임을 경감하는 내용이 담겨졌다.

개정 이전에는 제조업자의 책임이 성립되기 위해서 원칙적으로 피해자가 결함의 존재와 손해 발생 및 결함과 손해발생 사이의 인과관계, 제3자의 제공 원인 포함 부분 등을 직접 입증해야만 했다.

때문에 옥시 사건과 이케아 서랍장 사건처럼 피해가 발생하더라도 국내 제조물책임법이 소비자의 권익을 보호하지 못한다는 비판이 지속적으로 제기돼 왔다.

정현일 공정거래위원회 소비자안전정보과 사무관은 “개정안은 제품이 정상적으로 사용된 상태에서 사고가 발생했더라도 제품의 결함이 있다고 추정해 내렸던 2004년 대법원 판례 등을 명문화한 것”이라며 “소비자 측면에서 입증책임을 보다 완화해 개정안에 포함시킨게 눈에 띈다”고 말했다.

그동안 나왔던 대법원 판례는 ‘제조업자의 배타적 지배영역’에 속한 원인으로 사고가 발생해야 결함으로 인정했다.

배타적 지배영역은 제3자의 개입이 배제된 결함이 유일한 원인이어야 한다는 원칙이다.

하지만 개정안은 이를 ‘실질적 지배영역’으로 변경, 제3자가 제공한 원인이 개입할 여지가 있다하더라도 손해가 발생할 시 제품에 핵심적인 결함이 있다고 추정하는 원칙을 명시했다.

배타적 지배영역일 당시 피해를 입은 소비자가 제3자의 개입 여부를 입증해내야 했지만 실질적 지배영역으로 바뀌면서 입증책임을 보다 완화시킨 것이다.

판매되는 제품의 대부분은 고도의 기술을 바탕으로 제조되고, 이에 관한 정보는 제조업자에게 편중돼 있기 때문에 소비자가 제품의 결함 원인을 증명하기 힘들다는 지적을 받아들인 조치다.

공정위 관계자는 “현행 제조물책임법이 무과실책임을 원칙으로 하고 있는 점을 감안할 때 개정안은 공급자에서 피해자로 제도의 중심을 이동한 것”이라고 말했다.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으로 기업들 ‘한숨’

이번 개정안에는 불법행위를 억제하고 소비자 피해를 금전적으로 보장하기 위해 손해액의 3배까지 보상금을 지불할 수 있는 징벌적 손해배상제도가 도입됐다.

또 공급업자가 제조업자 또는 이전 공급업자를 알거나 알 수 있었을 경우에만 피해 보상을 청구할 수 있도록 제한했던 내용도 삭제해 결함 제조물로 인한 책임을 강화했다.

배상액에 상한을 두지 않는 미국의 징벌적 손해배상제도와 비교했을 때, 손해액의 3배를 상한으로 명시한 것은 처벌 수위가 낮다는 지적도 있지만 소비자 권익 보호 측면에서 긍정적인 변화라는 흐름이 우세하다.

하지만 기업들은 징벌적 손해배상제도가 자칫 경영활동에 족쇄를 채우는 ‘규제를 위한 규제’가 되지 않을까 우려하는 눈치다.

설명회에 참여한 기업 관계자들도 경영활동을 하지 못할 정도의 손해배상 소송이 제기될 것이라는 불안감을 내비쳤다.

한 업체 관계자는 “대기업의 하청기업의 경우 재료를 가공하거나 소재를 유통하는 형태로 제조에 참여하더라도 책임이 분할되는 것이 아니냐”며 “연대책임 조항이 있기 때문에 완성품과 부품제조업체간에도 분쟁이 늘어날 것”이라고 불만을 토로했다.

국내에선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 역사가 짧아 소송 사례가 흔치 않다.

하지만 해외에선 대규모 소송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지난해 생활용품업체 존슨앤드존슨은 미국 법원으로부터 난소암 피해자에게 약 1200억 원을 지급하라고 판결받았다. 이후 존슨앤드존슨은 난소암 피해자와 관련된 1200여 개 집단소송에 시달리고 있다.

공정위 관계자는 “기업들은 결함이 없는 제품을 소비자에게 공급하고 결함 제품에 대해서는 선제적이고 적극적인 리콜과 재발방지책을 마련해야 한다”며 “또 법개정 이후 제조물 책임소송 및 배상액이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제조물책임 보험을 적극 활용해 경영활동의 자유가 위축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피해자의 실질적인 보호를 보장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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