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병훈 한국전기산업연구원 원장.
권병훈 한국전기산업연구원 원장.

어느 해보다 무더웠던 여름 날씨로 밤잠을 설치던 기억을 뒤로하고, 문득 푸른 하늘에 이끌려 밖으로 나가고 싶어지는 계절이다.

최근에 경복궁에 다녀왔다. 초·중등 시절 종종 나들이와 소풍을 다니기도 했던 곳, 조선왕조를 기억하게 하는 형형색색 수십 개의 목조 건물 가운데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건청궁(乾淸宮)’이다.

건청궁은 광화문·흥례문·근정전을 차례대로 지나 ‘왕의 침실’ 강녕전과 향원정까지 넘어 10여분을 걸어서야 그 모습이 나타난다. 고종이 아버지 대원군의 그늘에서 벗어나려 일부러 경복궁에서 가장 깊은 외딴 곳에 지었다고 한다.

고종이 아관파천으로 경복궁을 떠나기 전까지 주요 거처로 쓰였던 건청궁은, 1909년 완전히 헐렸다가 100년 뒤인 2007년에야 복원됐다. 이 곳은 신문물에 관심이 많았던 고종의 취향을 반영한 듯 당대 첨단 기술의 전시장 같은 곳이었다. 건물 대부분이 서양식으로 지어졌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전기가 도입된 곳이기도 하다.

건청궁에 들어서면서, 우리 전기 업계의 120년 역사가 자연스럽게 머릿속을 스쳤다.

경복궁을 걸으며 필자가 직접 찍은 사진이다.
경복궁을 걸으며 필자가 직접 찍은 사진이다.

1887년 미국 에디슨 전등회사가 건청궁 근처에 세운 전기등소(電氣燈所)는 일본보다 2년 앞서 들어온 우리나라 최초의 발전소이자 동양 최초 발전소다. 전기등소의 발전 규모는 백열등 750개를 밝힐 수 있는 용량이다. 당시 조선 사람들은 전깃불을 보고 ‘건달불’이라 불렀다고 한다. “자주 꺼지고 돈도 많이 드는 게 건달과 비슷하다”는 이유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전기 회사는 1898년 이근배, 김두승이 미국인 사업가 콜브란(Colbran)과 만든 한성전기회사다. 이 회사는 서울 시내 전동·전차·전화 사업 운영권을 얻어 전기 산업 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

한성전기회사는 지금도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한국전력공사(한전)의 모태인 것이다.

조선 개화기에 최초의 전차 개통(1899), 최초의 민간 전기 점등(1900)으로 시작된 전기 산업은 일제강점기를 거쳐 1961년 새로운 도약의 기회를 맞았다. 당시 3대 전기 회사였던 조선전업·경성전기·남선전기가 ‘한국전력주식회사’로 통합된 것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초창기 한전은 사기업과 공기업의 성격을 모두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다 1981년 전두환 정부가 민간 보유 주식을 모두 매수하며 완전한 공기업이 되었다.

120년간 이룩한 우리 전력 업계의 발전(發展)사는 ‘상전벽해(桑田碧海·뽕나무밭이 바다가 됨)’로 요약할 수 있다. 1961년 36만 7000㎾에 불과했던 발전 시설 용량은 2019년 12만 9092㎿로 40만배 가까이 늘어났으며 세계 21번째 원전(고리1호기) 준공, '전기 업계의 노벨상' 에디슨 대상 수상 등 세계 전기사에 빼어난 발자취를 남겼다. 전기 품질면에서도 세계 최고 수준을 유지할 만큼 전기 선진국이 되었다.

이는 산업 발전의 원동력으로서 세계 10위권의 경제 선진국에 이르는 튼튼한 기반이 되었고, 우리 국민들은 유럽이나 미국 등 선진국보다 저렴하면서도 품질좋은 전기를 사용하고 있다.

4차 산업 혁명 이후 전기 수요에 대해선 전망이 엇갈린다. 다만 수요와 별개로 전기의 중요성이 현재보다 커질 수밖에 없다는 점에선 생각이 일치한다. 모든 것이 ‘끈’처럼 연결되는 초(超)연결 사회는 전기를 바탕으로 한 정보통신기술(ICT) 위에서 꽃 피울 수 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지난해 제9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의 목표치를 축소 조정하면서도 스마트 시티, 스마트 홈 부분에 대해서는 전력 소비량이 추가적으로 늘어날 것임을 예상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전기의 요람격인 건청궁에 들어서면서 우리 전기 업계가 4차 산업 혁명에 잘 대처하고 있는지 고민해 본다. 고종이 집권한 19세기 후반 조선은 ‘바람 앞 등불’ 같은 신세였다. 머리 위에선 러시아·중국이 밀고 들어오고, 바다 건너편에선 일본과 열강이 호시탐탐 침략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만약 이때 나라 빗장을 거는 대신 더 넓은 시각에서 글로벌 흐름을 읽고, 의연하게 대처했다면 어땠을까.

지금 우리나라도 120년 전과 다를 바 없다. 반도체·스마트폰 등 주력 산업은 중국의 맹렬한 추격으로 1위 자리가 위태롭고, 아무리 예전만 못해도 일본은 세계 3위 경제 대국이다. 미·중·일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4차 산업 혁명이라는 ‘총성 없는 전쟁’을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서는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자세가 절실하다. 특히 모든 산업의 근간을 이루는 전기 업계는 한 발 앞서 더 부지런하게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

또한, 지구환경의 변화로 인한 전기업계의 숙제들이 더욱 산적한 상황이다. 에너지 전환의 급속한 확대에 따른 계통 연계 문제, 대규모 발전·송전 제약에 따른 분산형 전원의 확대 문제, 전기요금의 상승문제 그리고 탄소 중립 실현에 대비한 전력 수급 문제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올해도 전기 업계는 코로나로 실적 회복이 쉽지 않을 전망이다. 전기신문이 최근 중전기 업계 주요 상장사 13곳의 올 1분기 실적을 분석한 결과, 총 8곳이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해 영업 이익이 감소했고 7곳은 적자를 지속했다. 매출액은 7곳이 개선됐으나, 영업 이익 성장으로 이어진 곳은 3곳에 불과했다. 다만 전선 업계는 구리 가격 상승 등에 힘입어 매출이 소폭 상승했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위태로운 상황에 닥쳤을 때 “백척간두(百尺竿頭) 같다”고 한다. 현재 전기 업계가 그렇다. 하지만 생각을 바꿔보자. 백척간두가 꼭 나쁜 걸까. 백 자(百尺)나 되는 높은 장대(竿)에 섰다(頭)는 것은 반대로 더 넓은 시야로 세상을 볼 수 있다는 뜻이다. 에너지 대전환 시대엔 포괄적 판단과 열린 사고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위기는 기회의 또 다른 이름이다.

권병훈 한국전기산업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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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공사 현장의 길라잡이-전기공사시공정보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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