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이후 사라지다시피 한 ‘보릿고개’란 단어가 최근 빈번히 들려온다. 극심한 불황으로 ‘제2의 춘궁기’를 겪고 있는 배전단가업계의 얘기다.

지난 상반기 만난 한전 배전단가업체 관계자 대다수는 근황을 묻는 말에 고개를 저었다. 설립 이후 처음 겪는 경영난이란 푸념부터 IMF 때와 흡사한 위기라는 토로까지 반응은 다양하지만, ‘상황이 매우 좋지 않다’는 인식만의 같다. 다만 앞선 위기들과 대조되는 한 가지 대목이 있다면 이 불황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일 것이다.

실제로 대화를 나눠본 10여개에 가까운 업체 관계자들은 상황이 좋지 않은 가장 큰 원인으로 ‘해결의 실마리가 없다’는 점을 공통적으로 꼽았다. 산업정책, 또는 정권에 따라 부침을 겪는 게 업계의 숙명이라지만 이번만큼은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게 그들이 느끼는 위기의식의 근원이다.

한전의 지속적인 적자와 대내외적 사업 정책도 위기를 키우고 있다고 지적한다. 전기요금은 제자리인 가운데 재생에너지 확대 정책이 본격화되며 적자폭은 날이 갈수록 확대되고 있는 반면, 한전은 약 6000억원을 들여 한전공대를 설립하겠다며 사업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늘어나는 적자, 악화되는 경영실적은 어디에서 벌충할 것인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고 업계는 입을 모은다.

때 아닌 보릿고개의 여파가 전력산업의 안전부실로도 이어질 기미가 엿보인다. 업계에 따르면 현재 현장에서는 긴급공사를 제외하고는 기존에 진행돼오던 신규·유지보수 사업도 씨가 말랐다고 한다. 사태가 장기화되면 설비 노후화, 유지관리 부실 등에 따른 사고가 발생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극심한 기근에 시달리면 춘궁기가 지나도 내상이 남을 수밖에 없다. 그 상처는 업계의 균형 파괴, 전력공급품질 저하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것이다. ‘농부는 굶어 죽어도 그 종자는 베고 죽는다’는 옛말이 있다. 어려울수록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한다. 보릿고개를 현명히 나는 지혜가 절실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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