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 샌드박스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린다. ‘규제 샌드박스’는 신산업 및 신기술 분야에서 새로운 제품·서비스를 내놓을 때 일정 기간 기존의 규제를 면제하거나 유예하는 제도다. 어린이가 자유롭게 뛰어노는 모래 놀이터와 같이 규제가 없는 환경을 제공하고, 그 속에서 다양한 아이디어를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한다고 해서 샌드박스라고 부른다.

사업자가 새로운 제품·서비스에 대해 규제 샌드박스 적용을 신청하면 법령을 개정하지 않고도 심사를 거쳐 시범 사업, 임시 허가 등으로 규제를 면제·유예할 수 있다. 그만큼 규제로 인해 출시할 수 없었던 상품을 빠르게 시장에 소개할 수 있다. 만일 문제가 생기면 사후에 규제한다.

규제 샌드박스의 시초는 영국이다. 핀테크 사업 활성화를 목적으로 이 제도를 시행했다.

지난 2016년 영국 금융규제 당국은 혁신적 금융사업자를 선정하며 규제 샌드박스를 최초로 도입한 뒤 현재에 이르고 있다. 소비자의 경험과 성과를 향상할 수 있는 제품·서비스 개발을 지원해 금융 서비스의 경쟁과 성장을 촉진하기 위한 취지의 제도다.

영국은 올해까지 276개 기업을 지원, 89개 사업자를 혁신적 금융사업자로 선정했다. 80% 이상이 미인가 스타트업이다. 또 캐나다와 미국, 싱가포르 등 해외 기업도 참여했다. 진입장벽은 낮춰졌고, 도전의 요소는 늘어났다.

이 같은 규제 샌드박스는 전 세계로 확장하는 모양새다. 호주, 싱가포르, 일본 등이 속속 도입했다.

문재인 대통령(가운데)이 규제 혁신 토론회 ‘규제혁신, 내 삶을 바꾸는 힘’을 주재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가운데)이 규제 혁신 토론회 ‘규제혁신, 내 삶을 바꾸는 힘’을 주재하고 있다.

◆ 3년 차 文 정부…‘선(先) 허용 후(後) 규제’ 놀이터 출범 임박

규제 샌드박스는 문재인 정부에서 본격적으로 시행될 예정이다. 지난해 초 더불어민주당은 ‘규제 샌드박스 5법’인 ▲정보통신융합특별법(정보통신 진흥 및 융합 활성화 등에 관한 특별법) ▲산업융합 촉진법 ▲지역 특구 규제특례법(지역특화발전특구에 대한 규제특례법) ▲금융혁신지원특별법 ▲행정규제기본법 등을 발의했다.

이 가운데 ‘규제 샌드박스 3법’인 정보통신융합특별법, 산업융합 촉진법, 지역 특구 규제특례법은 지난해 8월 임시국회를 통과했다. 이어 최근 금융혁신지원특별법이 본회의를 통과하는 데 성공했다.

행정규제기본법은 5법 가운데 가장 오래 계류돼있다가 지난 연말 국회 정무위원회 법안소위원회 문턱을 넘었다.

이제 2019년부터 마치 놀이터와 같이 새로운 산업 아이디어가 끊임없이 창출되고 각종 실험을 통해 성공과 실패가 판가름 나는 환경이 조성되는 셈이다.

실패가 곧 끝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신산업의 아이디어가 부진을 겪을 것으로 판단되면 그때부터 관(官)에서 나서 규제를 시행한다. 지나친 규제 완화도 국민 생명·안전 위협 및 환경 파괴 등의 우려가 수면 위로 드러날 때 차단 절차를 맞이하게 된다.

규제 샌드박스는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설명하는 핵심 키워드로 자리매김할 전망이다. 이미 기술력이 확보됐지만 규정으로 인해 허가를 받지 못한 ▲배달 로봇 ▲유인 드론 ▲플라잉보드 등의 신산업·신기술이 생활에 전면적으로 등장한다.

규제 샌드박스 도입을 통해 문재인 정부는 ‘작은 정부’와 ‘큰 정부’ 사이의 ‘중간 정부’ 성격을 갖추게 됐다.

1998년 김대중 정부가 추진한 빅딜을 반대하는 대우전자서비스 노동자
1998년 김대중 정부가 추진한 빅딜을 반대하는 대우전자서비스 노동자

◆ 국가 부도 그 이후…10년 주기 ‘크고 작은 정부’ 교체사(史)

‘작은 정부’는 관(官)이 개입하는 규제의 범위 및 강도(强度)를 최소화해 성장을 촉진하는 데 주안점을 둔다. ‘큰 정부’는 대조적으로 규제를 통한 시장 질서 확립을 중요시한다.

지금까지 규제의 시행 방안에 대해서는 ‘흑백논리’가 지배하는 모습이 짙었다. 규제 완화를 통한 ‘작은 정부’, 규제 강화를 통한 ‘큰 정부’, 그 사이에 절충안을 찾기 어려웠다.

특히 대한민국의 경우 보수 성향 정부는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성격이 강했다. 경제 성장을 중요시하는 특성상 기업의 활동을 자유롭게 해 부를 창출해야 한다는 주장이 경제 정책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진보 성향 정부의 경우 ‘큰 정부’ 기조에 맞춰 정책을 운용하는 모습이었다. 기업에 편중된 부를 골고루 나눠 복지에 일조해야 한다는 철학을 바탕으로 했다. 자연히 기업에 대한 ‘참견’이 수반될 수밖에 없는 경제 정책이다.

‘국가 부도의 날’을 맞이했던 1997년 IMF 시대 이후 정부의 정책은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10년 주기로 큰 정부와 작은 정부를 오갔다.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는 IMF 극복을 목표로 기업 간 합병 ‘빅딜’을 단행했다. 대기업 간 계열사 구조조정을 방안으로 부실 계열사는 과감하게 정리하도록 유도했다.

이를 통해 대우의 전자와 삼성의 자동차사업 교환, LG와 현대의 반도체사업 통합 등이 추진됐다.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는 복지국가형 경제정책인 ‘비전 2030’을 시행했다. 정부 출범 당시 수립돼 끝 무렵인 2006년 발표된 정책으로 성장과 복지의 동반성장을 내세웠다.

당시 이 정책을 펼치기 위한 재원 마련 방안으로 ‘부자 증세’가 나왔다. 종합부동산세가 대표적 사례다.

즉 ‘비전 2030’도 정부의 고유 역할인 과세를 통해 추진하려던 정책으로 볼 수 있다.

LG전자 반도체 부문이 현대로 넘어간 사실을 보도하는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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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정부에 이어 2008년 출범한 이명박 정부는 정부 명칭과 관련, ‘실용정부’를 고려한 바 있다. 규제를 최소화해 탄력적인 정책을 우선순위에 놓겠다는 의지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현대건설 CEO 출신인 이명박 전 대통령은 서울특별시장 재직 시절 ▲청계천 복원 ▲버스 개편 등의 사업을 과감히 추진, 대권을 획득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그런 만큼 이명박 정부의 경제 정책은 규제 혁파에 주안점을 뒀다.

‘규제 전봇대’가 대표적 사례다. 2008년 1월 대통령직인수위원회 회의에서 전남 영암군 대불국가산업단지의 전봇대로 인해 대형트럭이 이동에 방해를 받는다고 기업들이 불만을 제기한 것이 계기가 돼 규제개혁의 상징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 전 대통령은 규제개혁 회의 때마다 “전봇대를 뽑겠다”는 표현을 강한 의지를 표출했다.

이명박 정부와 결을 달리했지만 같은 당 출신인 박근혜 정부는 ‘초이노믹스’를 출범시켰다. 초이노믹스의 대표적인 골자는 부동산시장 활성화를 위한 LTV(주택담보인정비율) 및 DTI(총부채상환비율) 완화 등 금융규제 개혁이다.

박근혜 정부는 규제를 ‘손톱 밑 가시’로 비유했다. 실제로 2013년에는 당시 여당인 새누리당 산하에 ‘손톱 밑 가시 뽑기 특별위원회’를 설치하기도 했다. 규제개혁 사례로 푸드트럭을 합법화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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