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안전관리 업계를 중심으로 전기안전등급제 도입 논의가 본격화되고 있다. 등급제의 핵심은 ‘사고 조치’ 중심이던 전기설비 안전관리를 ‘사전 예방’ 쪽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전기설비에도 등급을 매겨 그 등급에 따라 부품을 교체하거나 정비하는 등의 조치를 하도록 법제화하는 것이다. 이 개념은 원전의 계획예방정비와 일맥상통한다. 원전은 일정기간(18개월) 가동한 후 강제로 가동을 중지한 후 사전에 세워놓은 정비 매뉴얼에 따라 일괄 정비를 하고 있다. 이유는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다. 고장이나 사고 위험을 최대한 없애기 위한 것이다. 계획예방정비를 도입한 이후 국내 원전은 고장정지율이 급감, 세계 최고 수준의 가동률을 유지하고 있다.

단점은 물론 비용 증가다. 굳이 별 이상이 없는 설비를 강제로 정지시켜 정비를 하기 때문에 그만큼 비용은 늘어나게 된다. 하지만 원전회사인 한국수력원자력이 이 제도를 수십 년 동안 지속하고 있는 이유는 비용 대비 효과가 더 크기 때문임은 두말하면 사족이다.

전기안전등급제 역시 다르지 않다. 전기설비의 사전 사후 검사를 맡고 있는 전기안전공사는 지난 2015년 청소년활동진흥원과 시설안전공단, 가스안전공사, 소방안전협회와 안전지원협의체를 구성해 일부 청소년 수련시설을 대상으로 전기안전등급제를 시범 실시해왔고, 유의미한 결과를 도출, 제도 법제화 등 제반작업에 속도를 내고 있다.

그동안 전기안전공사는 전기설비를 점검한 후 합격‧불합격 판정만 내려 설비의 노후화 상태나 이상 여부 등 세세한 부분을 확인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등급제가 법제화되면 전기설비의 운영환경 등 다양한 평가요소가 추가돼 고장과 사고를 사전에 예방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다.

모든 전기설비에 장착돼 있는 배전 및·분전함 설치상태와 노출상태, 먼지·분진·가스 발생환경과 기름때·먼지·분진 고착 유무, 그리고 분전함 내연성 재료 사용 유무, 업종·용량 등 다양한 환경적 요인까지 판단기준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당연히 전기설비 자체는 이상이 없더라도 화재 위험이 높은 환경에서는 전기설비 안전대책을 더 마련해야 높은 등급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그만큼 전기설비의 안전도는 높아진다. 걸림돌은 법안과 비용이다. 먼저 법안이다. 등급제를 시행하려면 전기안전관리법이 제정돼야 하는데, 이 법안은 2016년 12월 김정훈 의원이 발의한 적이 있으나 회기를 넘겨 폐기됐다. 비용 증가를 우려한 사업자단체의 반발과 물가상승의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는 반대 측의 논리에 더 이상 진전되지 못했다.

전기안전공사 한 관계자는 “사고나 고장 감소 등 효과가 큰 전기안전등급제의 확대 적용을 적극 논의하고 있는 상황”이라며 “등급제로 인해 비용 부담을 느끼는 곳도 적지 않은 만큼 화재예방 대책 마련이 시급한 곳부터 단계적으로 추진해 나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법안 제정과 병행해 현재 실시하고 있는 시범사업의 범위를 넓히겠다는 얘기다. 아파트만 해도 해마다 600여건의 전기화재가 발생하고 있고, 시설 전체로 확대하면 수천 건에 달한다. 사상자는 수백 명이 넘고, 재산피해는 수조원에 이른다. 사고나 고장감소 효과가 확실한 제도의 도입을 미룰 이유가 없다. 국가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줄 책임이 있다. 의원입법이 아니더라도 정부 입법으로라도 전기안전관리법을 제정하고, 등급제를 시행해야 한다. 등급제는 정기검진과 같다. 주기적이고, 세밀한 검진이 큰 병을 미리 발견하거나 예방할 수 있는 것처럼 등급제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 줄 최선의 안전책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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