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일면 숭실대학교 교수
황일면 숭실대학교 교수

민족의 명절 설을 맞아 부모와 친척, 친구, 정든 지인들을 만나면서 서로가 안부를 묻고 복된 새해를 빌어주는 덕담을 나누며 기쁨과 의미를 같이한 귀중한 추억을 만든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이같이 음식을 나누거나 그 기쁜 만남을 준비한 여정 속에는 그것을 뒷받침한 손길과 공들인 마음 씀이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마음이 상하고 아프고 괴로움을 겪은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좋은 사이였으나 좋지 못한 사이가 되거나,큰 부담을 겪게 된 사람들 말이다.

우리의 일상이 행복하려면 ‘누구와,무엇을,어떤 마음으로’ 하느냐에 대한 답이 조화를 잘 이룰 때 가능한 데, 명절을 보내면서 좋은 추억과 나쁜 후유증의 갈림이 되는 것은 ‘누구와, 어떤 마음으로’의 문제이며,‘좋은 사이’에 대한 이해부족과 자기중심사고에서 문제를 찾을 수 있다.

결혼한 지 조금 지나서 갓 출산한 아들을 둔 딸과 곧 출산하게 될 임신부 딸을 둔 친정엄마가 헤아리는 딸의 입장을 들어 볼 기회가 있었다. 손주를 돌보아준다고 아들집에 불쑥불쑥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시부모를 둔 딸의 고충, 멀리 떨어져 있어서 자주 찾아보지는 못하지만 명절에는 시댁에 맞추어 어른들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려오던 딸이 출산을 앞두고 자신의 뜻대로 며느리 역할을 못해 고심하는 이야기였다.

명절연휴에 더 많은 가족들 속에서 힘들어할 딸과, 곧 손주를 출산할 예쁜 며느리를 보고 싶어 하는 시부모와 친척들 때문에 육체적인 고통과 심리적 압박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찾아보아야 하는 둘째딸의 힘든 입장을 같이 헤아리면서,‘좋은 사이’를 유지하기가 얼마나 쉽지 않은가를 생각하게 된다. 명절을 맞아 처신하는 개개인의 행동과 태도에 대한 판단은 보는 사람들의 시각과 생각에 따라 다르다. 좋은 마음으로 좋은 관계를 기대하고 했던 행동이 다르게 이해되고, 그에 따라 좋은 감정과 나쁜 감정을 갖게 되며, 이는 가족관계에 영향을 주고, 사람들 간의 거리를 만들게 되면서. 가족, 친척들을 포함한 인간관계를 좌우하는 것을 보게 된다.

사람은 이 세상을 혼자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관계적 존재라고 인정해야 하는데, 사람과 사람사이에는 관계가 있고 거리감이 있다. 관계에는 좋은 관계가 있고, 그렇지 못한 관계가 있으며, 거리감에는 물리적 거리감, 정서적 거리감, 그리고 심리적 거리감 등이 있게 된다. 관계가 좋으면 거리감도 가깝지만, 관계가 좋지 않으면 거리감도 생기거나 멀어지게 된다. 어떠한 경우이든 관계와 거리감을 잘 관리하지 못하면, 그 관계에는 문제가 생기게 되며 부작용이 있게 된다.

특히 심리적 거리감은 사람들과의 관계에 다양한 영향을 미친다. 과도한 밀착도 조심해야 하고 자신도 모르게 서서히 멀어지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너무 가깝거나 멀어도 문제가 발생하니까.

미국의 인류학자인 에드워드 홀(Edward T.Hall)은 50년 전에 개인공간을 4가지 차원으로 분류하고 있다. 요즘에는 ‘친밀 거리’ 4가지 유형으로 소개되기도 한다. 첫째는 가장 가까운 친밀한 거리 18인치(약 46㎝) 이내, 둘째는 사적인 거리 4피트(약 1.2m) 이내, 셋째는 사무적 인간관계가 이루어지는 사회적 거리 30피트(약 3.6m) 이내. 넷째는 사회적 거리를 벗어나 연설이나 강의 등과 같은 공적활동이 이루어지는 공적거리가 그것이다. 이 거리는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인종이나 성별, 연령등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난다고 연구자들은 말하고 있다. 예컨대 중국인의 친밀함의 거리는 미국인이나 한국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짧은 편이고, 또한 여자는 남자보다,서울사람은 농촌사람보다 친밀함의 거리가 짧다고 말한다. 기본적으로 친밀함의 거리는 자기방어를 위한 최소한의 사적인 공간이므로 이 거리를 함부로 침범해서는 안되며, 가족이나 연인처럼 친밀한 유대관계가 전제돼야 한다. 사적인 거리도 어느 정도의 친밀함과 함께,격식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모르는 상대가 사적인 거리인 4피트 안으로 접근하면, 긴장하고 스트레스를 받지만, 연인이나 사랑하는 사람이 4피트이상 멀어지면, 오히려 관계가 멀어지는 것을 걱정하고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한다. 관계에 맞는 적절한 거리가 유지돼야 함을 말해 준다.

‘사이가 좋다’라는 것이나 ‘좋은 관계’라는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유지되어야 하는 물리적, 정서적, 심리적거리가 적절하게 유지되는 상태를 말한다. ‘좋은 관계’라는 것은 너무 가깝거나 너무 멀리 벗어난 거리가 아닌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누구나 건강한 관계를 위해서는 ‘경계(boundary)’가 필요하며 이 거리유지에 경계가 분명해야 한다. 경계가 애매하면 필요 이상으로 서로에게 관여하게 되어 피곤함을 느끼게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명료한 경계선이 살아있는 관계이다. 내가 지켜야 하는 거리, 네가 다가올 수 있는 거리가 명확해야 한다. 건강한 거리감을 존중하면서, 경계를 넘지 않고, 상대방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는 ‘좋은 사이’를 유지하면서 성숙한 삶을 살아갑시다. 할 수 있는 만큼의 도움을 주려고 애쓰며 서로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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