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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촌광장)신화, 원자력, 에너지 대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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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희 가천대 에너지IT학과 교수
민족이란 ‘신화공동체’다. 같은 신화를 믿는 자들이 같은 민족이다. 같은 신화 속에서 인간은 같은 것을 원하고 같은 것을 기뻐하고 같은 것을 분노한다. 단군신화로 한민족이, 삼황오제로 한족이, 창세기와 아브라함으로 유태인이 ‘정의’된다.
신화를 처음 발명하고 그 쓰임과 효과를 제대로 알았던 최초의 원숭이가 바로 우리의 조상 크로마뇽인이다. 라스코와 알타미라의 어두운 동굴 깊은 곳에 그림을 그렸다. 변변한 무기가 없으니 열 번 사냥하면 다섯 번은 실패하고, 두세 번은 당한다. 겨우 한 번을 기적 같이 승리한다. 이것을 기록했다. 거대한 맘모스를 홀로 대적하고 들소와 검은소와 코뿔소을 이겼던 영웅의 이야기. 동굴의 입구를 지나 한 참을 들어간 그 깊은 곳 벽과 천정에, 조명도 물감도 없이도 여러 달 여러 해를 투자해서 화려하게 그렸다. 실크로드 둔황의 막고굴과 터키 카파도키아의 괴레메 동굴성당에서 볼 수 있듯이.
영웅적인 크로마뇽인 대장은 무리를 거느리고 해마다 그곳을 찾는다. 이미 약간의 광대버섯을 나눠먹어 모두 환각상태다. 동굴 깊이 들어가며 손에 든 횃불이 일렁이면 그림자가 길게 초현실적으로 출렁인다. 조용하고 느리게 말하는 그의 이야기는 몽환의 저편에서 울려 가슴으로 젖어든다. 절로 경건해진다. 소피아 성당에서처럼. 대장은 영웅에서 신으로 태어난다. 무리는 드디어 종족 그리고 민족이 된다.
나중에 파라오와 진시황과 모세도 똑같은 의도를 가지고 똑같은 일을 했다. 한민족은 단군을 만들었다. 따르는 자들을 운명공동체 소위 ‘민족’으로 만들고자 했던 일, 신화의 발명이다. 그 이후 모든 크로마뇽인은 작든 크든 신화를 만들고 활용해왔다. 그 신화는 비논리적이며 초월적이어야 한다. 가장 중요한 점은, 인간 수준에서 절대 불가능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골목에서 맨 주먹으로 열 명을 해치운 일. 북극에서 냉장고를 팔고 사하라에서 히터를 판 일. 엘리베이터에서 100억을 투자받은 일. 드디어 후배가 나를 따른다. 뭐라 해도 믿는다.
바위에서 칼을 뽑으면 왕이 된다. 백사장 사진 한 장만 들고 26만t짜리 유조선을 수주한 총수의 신화를 믿으면 현대의 직원이 아닌 현대가족이 된다. 가족이 되면 논리와 상식을 따지지 않고 서로 돕는다.
삼황오제를 믿는 한족이나 단군을 믿는 한민족이나 모두 통일을 꿈꾼다. 같은 신화를 믿으면 죽음을 불사하고 싸우더라도 통일전쟁이다. 다른 신화를 믿으면 침략전쟁이다. 통일이 아닌 정복과 지배를 원한다. 해서 다른 신화끼리의 싸움은 극단적이다. 옳고 그름은 이미 문제가 아니다. 우리냐 적이냐의 문제다. 신화(종교)의 충돌은 가장 파괴적이다.
요즘 보니 우리나라에선 원자력도 신화다. 하긴 신화의 요소를 모두 갖추긴 했다. 원자력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힘으로 모든 것을 파괴한다. 그리고 질량으로부터 에너지를 창조한다. 민족의 적을 무너뜨린 것도, 냉전의 시대를 이겨낸 배경도, 산업화의 상징도 원자력이었다. 우리는 한때 핵무기 강국이 되기를 몰래 기도했었고 이휘소 신화를 믿기도 했다. 박정희 신화의 한 쪽에도 원자력이 있다.
원자력이 신화가 되니 그것을 말하는 자들은 성직자가 되었다. 매년 번갈아 열리는 국가 에너지 계획과 전력수급계획에서는 원자력에겐 ‘정책성 전원’으로 특별한 경의가 표해지고 가장 중요한 자리가 주어졌다. 나머지 것들은 그 뒤를 따랐다.
그런데 지금 신화의 전쟁을 보고 있다. 원자력 신화를 믿는 성직자들과 믿지 않는 외부자들 사이에 싸움이 격렬하다. 신화 전쟁이므로, 그것을 바라보며 양비론을 주장하거나 로도스 우화를 거론하며 혀를 차거나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어떤 숫자도 논리도 이미 설 자리가 없다.
하지만 하고 싶은 기도가 있다. 기도는 인간의 것이 아니니 신화와 성직자들에게 하자. (짓던 신전을 무너뜨리려던 인간들에겐 왜 그랬냐고 묻고 싶긴 하다. 신화는 함부로 건드리는 게 아니다.)
신화가 인간의 논리를 다투면, 이미 신화가 아니다. 인간이 신을 찾지 않고 성직자를 무시할 때는 그들이 평안하다는 뜻이다. 조금 멀리한다고 화를 내거나 계시록으로 협박하는 것은 성직자가 사욕을 부렸던 십자군 때나 있던 일이다. 어차피 궁핍하고 어려워지면 다시 신화를 찾게 될 것이다. 그때 은혜로움으로 부양하면, 원자력 신화는 다시 강건해질 것이다.
다른 신화가 생기면 어쩌냐고? 그게 혁명이다. 신화에도 흥망과 성쇠가 있으니, 또 다른 에너지 신화를 따르게 되면, 그것이 에너지 대전환이다. 그러면 재생에너지를 믿으면 된다. 성직자는 인간계의 번거로움을 벗어나서 좋고, 우리 모두는 평안하고 배부를 것이다.
작성 : 2017년 08월 23일(수) 12:33
게시 : 2017년 08월 30일(수) 13:46


홍준희 가천대 에너지IT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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