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영화 관객 수가 지난해 같은 달보다 20% 가까이 급감했다고 한다.

“현실이 영화보다 더 흥미진진하다”고 자조하는 사람이 우리 주변에 넘쳐날 정도로 조선시대, 아니 저 멀리 삼국시대에서나 일어남 직한 일들이 21세기 대한민국에서 펼쳐지고 있는 탓이다.

등장인물들도 부지기수인 데다 면면까지 휘황찬란하다. 벌어진 사건도 너무 다양하면서도 마구 복잡하다. ‘단 하루라도 ’멈춰진 시간‘ 속에 갇혔다 나오면 따라잡기 힘들겠구나’ 싶어질 정도다.

어지간한 스토리나 웬만한 영상미로는 현실에 맞서 관객을 스크린 앞에 끌어다 놓기 힘들다는 것은 국내 영화인들도 인정한다.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는 현실, 아무리 외치고 울부짖어도 대답 없는 메아리….

이럴 때는 차갑게 생각하고 뜨겁게 행동하는 것 못잖게 마음을 달래야 한다. 앞으로 수십 년은 더 살아갈 우리네 정신 건강이기 때문이다.

잔잔하고 나지막하게 감성에 호소하는 영화를 보는 것이 힐링 방법의 하나라면 감히 추천할 만한 영화가 판타지 ‘가려진 시간’(감독 엄태화)이다. 외부 악재가 산적한 지난 11월16일 개봉해 평단과 관객의 호평에 힘입어 한창 상영 중인 영화다.

간략한 스토리는 이렇다.

“교통사고로 친엄마를 잃은 13세 ‘수린’(신은수)은 ‘새 아빠’(김희원)와 함께 화노도로 이사를 온다.

수린은 낯선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채 공상에 빠져 홀로 지낸다. 그런 수린에게 같은 초등학교에 다니는 ‘성민’(이효제)이 먼저 다가오고 ‘고아’라는 공통점을 가진 그들은 빠르게 친해진다.

어느 날, 터널 공사장 발파 현장을 구경하기 위해 수린과 성민은 친구 두 명과 산으로 간다. 다음날 모두 실종된 채 수린 혼자 발견된다.

며칠 뒤, 자신이 성민이라고 주장하는 ‘낯선 남자’(강동원)가 수린 앞에 등장한다.

멈춰진 시간 속에 갇혀 어른이 돼버렸다는 그의 말을 모두가 믿지 않지만 수린만큼은 믿어주는데….”

‘시간 정지’라는 동화적이면서 신선한, 그러나 다분히 충격적인 스토리를 필두로 강동원의 패셔니스타 이미지를 내던진 파격적인 변신, 이효제·신은수 등 어린 배우들의 열연, 김희원·권해효 등 연기파 배우들의 든든한 뒷받침까지 영화 자체로도 알차다.

기자가 이 영화를 사랑하게 된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영화 밑바탕에 깔린 ‘착한 정서’가 좋아서다.

후반부 수린을 살리기 위한 낯선 남자의 ‘선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현실에는 있지만, 아니 진짜 많지만 이 영화에는 전혀 없는 것들 때문이다.

바로 집단 따돌림(왕따), 롤리타 콤플렉스 또는 소아 성애, 가정 폭력, 살인, 비리 경찰 등이다.

화노도 어린이들은 도시에서 전학 온 낯선 수린을 친구로 받아들인다. 새 아빠는 재혼한 아내가 데려온 의붓딸을 그가 죽은 뒤에도 친딸처럼 아끼고 사랑한다. ‘형사반장’(권해효)과 부하 형사들은 실종된 어린이들을 찾고 수린을 지키기 위해 쉴새 없이 산을 오르내린다.

등장인물들이 모두 하나같이 착하고 진실하다. 다른 영화들과는 180도 다르다.

국내 ‘착한 영화’의 대명사는 앞서 2013년 1000만 관객을 웃고 울린 휴먼 코미디 ‘7번방의 선물’(감독 이환경)이다.

하지만 그 영화에서도 ‘막강한 권력에 의한 민초의 억울한 죽음’이라는 우리 사회 어딘가에서 지금도 일어나고 있을 법한 ‘현실’이 투영된 것이 사실이다.

다시 ‘가려진 시간’을 떠올려봤다. 문득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 아닌가 싶어진다.

그런 영화 속 캐릭터들의 모습과 이야기가 동화 속 요정을 만난 듯 신선했고 머리를 숙일 정도로 고맙게 느껴졌다니….

나 자신이 이미 멍들고 물들고 길들어 버린 것 아닌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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