덥다. 1994년 여름을 기숙사에서 선풍기로 당당히 버텼던 필자는 올해 정도(?)의 더위에는 의연해지고자 했지만, 결국 에어컨을 입에 달고 사는 것을 보면 지난 20년간 생활 습관도 많이 변한 듯하다. 전기료 누진체계가 더위보다 핫한 족적을 남기고 지나가는 것은 이번 뿐이 아닐 것이다. 기후변화와 전기중심의 생활패턴은 아마도 전력피크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할 것이고 전력수급 당사자들의 고민은 깊어질 것이 뻔하다. 손바닥만 한 땅에서 뭐 하나 하기 쉬운 것이 없다. 발전소도 빼곡히 지어질 수밖에 없다.

단일 부지에 여러 발전소가 들어오는 것은 나름 이득이 있다. 경제성도 높이고 문제가 생기거나 사고가 나면 이웃 발전소의 인력이나 자재를 활용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웃집 불이 멀쩡한 우리 집으로 옮겨 붙을 수 있듯이, 사고가 연쇄적으로 이어져서 더 큰 손실을 초래할 가능성도 상존한다.

우리나라에는 크게 네 곳에 원자력발전소(이하 원전) 부지가 있는데, 적게는 6개 많게는 10개의 발전소가 수 킬로미터 이내에 자리 잡고 있다. 후쿠시마 사고를 목도한 마당에 인근 주민들의 걱정이 큰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사업자로 하여금 원전이 밀집하고 있을 때의 안전성을 보다 면밀하게 분석하라는 규제당국의 조치는 매우 바람직하다. 그러면 이제까지는 다수의 원전에 대한 안전성 평가가 없었느냐? 있었다. 법체계에도 반영되어 있고, 부지를 선정하거나 방사선영향을 분석하는 과정에도 다수의 원전에 대한 효과가 고려되어 있다. 그렇다면 부족했던 점은 무엇인가? 다수의 원전에 동시에 심각한 사건이 발생하고 그 결과가 복합적으로 엮이는 경우에 대해서는 검토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드물기 때문이다. 흔치 않은 상황에 대해서는 잠정 접어두자는 것이 이제까지의 합의였다. 드물게 일어나는 일까지 신경을 쓰고 재원을 투입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렇지 않아도 돈 쓸 곳은 많다.

지금 이 문제가 다른 나라보다 우리나라에서 중요한 현안이라 국내 유관기관에서 앞선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 여건을 반영한 정확한 분석을 위해서는 아직 부족함이 많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일반적인 견해다. 흔치는 않지만 심각한 결과를 만드는 산업재해의 안전성평가는 확률적인 방법으로 분석을 한다. 이미 심각한 결과라고 하지 않았는가. 결과만 놓고 보면 산업을 접으라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산업으로 인한 득실의 가치판단을 위해서 재해의 빈도를 고려하게 된다. 하지만 드물게 일어나는 사건은 빈도가 불확실하고, 다수의 시설에서 발생하는 재해 손실을 계산하는 것도 상상외로 복잡하다. 계산이 불분명하니 안전 기준을 만들기도 쉽지 않다. 참조할 사례가 없어서 아마 우리는 퍼스트무버(First Mover)가 될 가능성이 높다. 새로운 안전 현안을 해결하는 합리적인 과정은 우리의 불안감을 해소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기술력을 한층 끌어올리는 수범 사례로도 남게 될 것이다.

최근 확률적인 방법을 통해 다수의 원전 안전을 평가하라는 목소리가 자주 들리는데, 그 역할과 한계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뒷받침되어 부적절한 확증편향의 오류를 범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를 위해서 인문과 기술적 측면의 상호보완적인 고찰이 필요함은 자명할 것이다.

발전소가 증가함에 따른 위험도, 밀집됨에 따른 추가 위험도, 타 산업시설과의 비교를 통한 득실 계산은 확률적인 방법만이 가능한 답변을 제공한다. 반면 계산 결과를 토대로 사회가 수용할 수 있는 위험도에 대한 가치 판단을 하는 것은 인문학적인 관점이다. 이 두 가지가 따로 놀면서 찬반 의견이 좁아지지 않고 사회적 비용만 늘어나는 안타까운 경우가 종종 있다. 여기까지는 위험을 제한하는 규제에 해당된다. 사실 더 중요한 것은 여기가 시작이라는 점이다. 특정 시점에서의 위험도가 요건이 되는 것이 아니라, 위험도가 지속적으로 낮아지도록 유도할 수 있는 제도적인 뒷받침이 필요하다. 더욱이 계산의 신뢰도가 충분하지 않다면, 기준설정보다 방향제시가 실질적으로 안전을 개선시키는 방법이 될 것이다.

집까지 오르는 승강기 안에 광고영상이 흘러나온다. 현재 위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가고자 하는 방향이 중요하다. 얼마나 빨리 가느냐보다 얼마나 정확하게 가느냐가 중요하다. 딱 지금의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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