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남숙(아시안프렌즈 이사장)
이남숙(아시안프렌즈 이사장)

지예가 시인이 되었다. 지난해 첫 시집이 나왔다는 걸 인터넷을 통해 알았다. 소식을 모르고 지낸 지 31년 만이다.

지예를 만난 건 1982년 이맘때쯤이다. 꽤 활발하게 사회봉사활동을 하는 지인의 부탁으로 서울 근교 소년원에서 자원봉사를 시작했다. YWCA 산하 청소년단체중 하나였던 S클럽이 장기계획으로 진행한 소년원 자원봉사는 80여 명의 원생들을 음악반, 무용반, 미술반, 문예반, 학습반 등으로 편성, 매주 일요일에 세 시간씩 특별활동을 실시하는 것이었는데, 내가 맡은 것은 고입 검정고시를 앞둔 학습반원 10여 명에게 격주로 영어를 가르치는 것이었다.

나는 S클럽 소속도 아니었고, 전공도 영어영문학이 아니어서 내심 걱정이 되었지만, "중학영어라면 해볼 만 하겠다." 싶어 해보겠노라 했다. 반 아이들 수만큼 중고 교과서도 수집하고, 참고서도 두어 권 샀다.

첫 수업날, "네가 뭔데 우리들 앞에서 떠드는 거니?"라는 말없는 배척의 시선을 느끼며 더듬더듬 내 소개를 하고 앞으로 이어질 수업방향 등을 애기했다. 식은땀이 흘렀다.

그러나 선입견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허둥대는 나와는 달리 그 아이들의 눈빛은 그 또래의 여느 소녀들처럼 맑고 신선하고 호기심에 차 있었다. 발그레한 뺨엔 보송보송한 솜털이 반짝거렸고 입가엔 웃음이 자르르 흘렀다. 아주 가끔씩 타인을, 어른들을 불신하고 적대시하는 듯 한 태도가 나를 당혹스럽게 했지만, 그것이 그 아이들의 맑고 빛나는 순수를 완전히 지배하지는 못하였다. 무엇보다도 나를 감동시킨 것은 “선생님!”하고 부르는, 난생 처음 들어보는 호칭이었다.

지예는 반에서 유독 시선을 끄는 소녀였다. 그 아이는 노골적으로 나를 무시했고, 수업시간 내내 툴툴거리고 삐죽거렸다. 누군가를 가르친 경험이 전무했던 당시의 나는 아이들과의 첫 만남에서 너무 겁을 먹은 나머지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다.

두 번째 수업을 마치고 교실을 나오는 내게 지예가 쪽지를 주었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쪽지를 읽었다.

“저를 겁내지 마세요. 저희들 모두 마찬가지예요. 저는 모범생들 보다는 문제아 쪽을 더 좋아해요. 오늘 수업시간에 열심히 하려고 했는데, 마음이 허락지 않았어요. 자꾸 삐딱하게 나가거든요. 저도 그런 제가 싫어요. 돌아가시면서 좋은 인상을 심어주지 못한 저희들을 용서해주세요. 그리고 2주 후에 꼭 와주세요.”

쪽지를 잡은 손이 떨리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지예가 내게 보인 첫 애정이었다.

지예는 글을 잘 썼다. 그 아이가 사물을 보는 시각이나 인식은 10대의 그것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예리하고 비판적이어서 내 무디어진 감성을 놀라게 하였고, 적당히 타협 잘 하는 내 영혼을 부끄럽게 하였다.

그해 11월 지예는 형기를 마치고 출소했다.

“무사히 집에 도착했습니다. 신기해요. 내 세상이 아닌듯한 착각이 듭니다. 어떤 나라일까요? 선생님, 새로 자유를 안은 지예를 위해 기도해주세요.”

출소 후 지예는 한 달에 한 번, 어떤 때는 두세 달에 한 번씩 변해가는 자신의 모슴을 편지로 알려왔다. 자유를 안은 지예는 방황을 멈추지 않으면서도 학원을 다니며 검정고시를 준비한다고 했다.

소년원 봉사 1년 후쯤 결혼하면서 자연스레 소년원에 발길을 멀리하게 되었다. 지예처럼 예쁘고 사랑스러운 그곳 소녀들에 대한 내 애정은 변함없었지만, 그걸 표현하고 실천하지 못하는 내 태만 때문에 가슴 한 켠이 늘 무거웠다.

언제부터인지, 무엇때문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지예를 비롯한 그 소녀들과 연락이 두절된 것이....

강산이 세 번 흘렀다. 쉰이 넘은 중년이 되었을 지예, 니체와 하이데거를 좋아했던 지예가 내 인생의 신록이었던 시절로 나를 데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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