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태규 산업부 전기위원장
오태규 산업부 전기위원장

5월 하순, 서북능선은 신록으로 빛나고 있었다. 한계령에서 대청봉으로 향하는 등산로 양옆에는 연초록 나뭇잎들이 아침 햇살에 눈부시게 반짝였고, 연분홍 진달래는 때 이른 여름 날씨에도 아직 떠나지 않은 봄의 자취를 느끼게 하였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게 개어 툭 트인 시야로 들어나는 용아장성, 공룡능선, 그 사이 계곡들의 웅장하고 매혹적인 자태는 감탄을 절로 자아내게 하였다. 뒤돌아보면 귀때기청봉과 대승령이 뒤따라오고 있고, 왼편으로는 가리봉과 주걱봉이 우뚝 솟아 있었다. 비 오듯 흐르는 땀을 그치며 내일의 공룡능선 산행을 위해 체력안배를 염두에 두고 걸었다.

공룡능선은 설악산을 좋아하는 일반등산객에게는 일종의 도전과제이자 막연한 자부심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공룡능선은 그 자체로 너더댓 시간의 고된 산행이기도 하려니와 공룡능선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어느 입구에서 시작해도 서너 시간을 걸어야 하고 또 서너 시간을 걸어야 하산할 수가 있기 때문에 상당한 체력과 무릎 보호가 요구되는 등산코스이다. 오색과 한계령에서 시작하여 대청봉을 거쳐 희운각대피소에 이르렀을 때 매번 무릎이 불편하여 천불동 계곡으로 하산하게 되었을 때 아쉬움은 매우 컸다.

2014년 10월 중순, 동서울터미널에서 심야버스를 타고 속초로 가서 택시로 소공원으로 이동한 후, 새벽 2시 40분 경 비선대 관리소를 지나 마등령을 향해 오르기 시작했다. 한밤중에 많은 등산객 무리에 끼어 오직 헤드랜턴 불빛에 따라 한걸음 씩 걷다보니 어느새 마등령 삼거리에 도달하였다. 오전 6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어둠을 가르며 아침 해가 막 떠오르고 있었다. 아직 어둠 속에 잠겨 있는 화채능선 너머로 밝아오는 여명의 주홍빛 하늘이 참 고왔다. 아침 식사를 하는 데 칼바람이 어찌나 세차게 불던지 체온이 급히 떨어지는 것 같아 서둘러 나한봉을 향해 출발하였다.

급경사를 숨 가쁘게 오르고 또 조심스레 내려가기를 반복하니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들고 시나브로 지쳐가고 있었다. 마등령과 희운각대피소 간의 중간 지점을 알리는 이정표를 지날 무렵부터는 발걸음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참을 걸었다고 생각하였는데 겨우 15분 정도 걸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 낭패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얼굴은 땀인지 눈물인지 분간하기 어렵게 젖어 들었다. 이때부터는 주변 경치를 관상하기보다 오직 안전 하산하기를 기도하기 시작했다. 나의 기억 속의 잘못과 어리석음을 들추어내어 반성하며 걸었다. 발걸음은 더디기만 한데 차츰 머릿속이 맑아지고 마음이 평안해지기 시작했다. 어떻든 해낼 수 있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11시 30분 경 신선대에 도착하여 걸어온 능선을 뒤돌아보니 햇빛에 반짝이는 봉우리들이 수고했다고 손짓하는 것 같았다. 신선대에서 바라보는 공룡능선과 천불동 계곡의 빛나는 봉우리들이 어찌나 아름답던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 후, 시간이 지나면서 설악산을 생각하면 다시 한 번 공룡능선에 가고 싶어졌다. 이번 등산에는 동년배 친구들과 함께 4인이 가게 되었는데 3인은 산을 좋아 하는데도 공룡능선 등산이 초행이었다. 한계령에서 중청대피소까지는 확 트인 시야로 들어오는 설악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며 천천히 걸었다. 중청대피소에 도착한 후, 다음날의 공룡능선 등산을 일찍 출발하기 위해 대청봉 일출 대신에 중청과 소청 너머로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대청봉에는 저녁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었다. 새벽 화장실에 다녀오다 보는 설악산 밤하늘은 영롱한 별빛으로 가득했다.

희운각대피소에서 7시10분 공룡능선을 향해 출발했다. 모두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신선대를 숨 가쁘게 오르내리고, 또 1275 봉우리 안부(鞍部)에서 휴식을 취한 다음부터는 휴식주기도 짧아지고 빈도도 잦아졌다. 드디어 12시30분경에 마등령 3거리에 도착하였다. 걸어온 능선의 우뚝우뚝 솟은 봉우리들을 바라보며 애썼다고 뿌듯한 마음으로 서로서로 위로를 하였다. 충분히 휴식을 취한 다음 1시 20분 경 비선대를 향해 하산을 시작했다. 하산 길에서 보는 내설악 암봉들의 도열 모습은 참으로 장관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이 하산길이 어렵고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다. 특히, 마지막 급경사는 지팡이에 의지하며 매우 조심스럽게 내려와야 했다. 5시 경 소공원 식당에 도착하였다. 안전하게 하산한 것을 기뻐하며 마시는 차디찬 막걸리는 달디 단 감로주가 아닌가!

공룡능선에서 만난 어느 등산객의 말이 머릿속을 맴돈다. 공룡능선 등산은 무슨 특별한 등산기술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부지런히 걸을 수 있는 체력과 인내심 만 있으면 된다고.

청마 유치환은 시 ‘생명의 서’에서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가서 고독 가운데 홀로 “나” 와 대면하라고 하였다. 설악산 1박2일은 준비에서 마칠 때까지 그 과정이 ‘따분한 일상’으로부터 벗어나 ‘가슴 뛰게 하는 일탈’을 경험하게 하는 아주 좋은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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